대척점의 당신, 나무 - 최준
나는 나를 번역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나는 당신의 중얼거림 밖에서 살아왔으니
의자로, 기둥으로, 불을 품은 육체로
다음 세대에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이념으로
무장한 적 있으니
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아직도 태양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네
가슴에 드리운 두꺼운 그늘을 뛰어넘으면
밝음이 오리라 기대하며 살지
다만 나는 나였을 뿐 당신이 아니었으니
당신이 아니었던 게 나의 잘못이라면
별은 무엇이고 달은 무엇인가
당신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순간
아는가
당신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내 속의 얼굴이
당신의 나이테로 불리는 주름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낮과 밤을 나누어 살아가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오늘도 내가 아니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디아스포라 - 최준
첫잠 깨어난 아이들의 겨드랑에
깃털 달아 주어 하늘로 돌려보내며
저주했지
날개 없이 태어난 운명을
그리고
아이 낳은 적 없는 여인의 하반신에
비늘과 꼬리지느러미를 조각해 수장(水葬)하고
절망했지
물을 숨 쉬는 아가미가 없음을
불과 화살촉
이전부터 새는 허공을 날고
물고기는 이미 생을 완성했는데
우린 여전히 떠돌고 있지
그건 처음부터 우리가 아니었는데도
날개와 지느러미
그 추락과 침몰의 시간을
여전히 여행 중이지
아, 그런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천사가 된 아이들과 인어 여인의 전설은
우리가 언제부터 연습한 비극이었을까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너 아직 거기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칸트의 산책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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