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대척점의 당신, 나무 - 최준

마루안 2021. 5. 12. 22:04

 

 

대척점의 당신, 나무 - 최준

 

 

나는 나를 번역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나는 당신의 중얼거림 밖에서 살아왔으니

 

의자로, 기둥으로, 불을 품은 육체로

다음 세대에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이념으로

무장한 적 있으니

 

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아직도 태양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네

가슴에 드리운 두꺼운 그늘을 뛰어넘으면

밝음이 오리라 기대하며 살지

다만 나는 나였을 뿐 당신이 아니었으니

당신이 아니었던 게 나의 잘못이라면

별은 무엇이고 달은 무엇인가

당신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순간

 

아는가

당신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내 속의 얼굴이

당신의 나이테로 불리는 주름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낮과 밤을 나누어 살아가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오늘도 내가 아니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디아스포라 - 최준


첫잠 깨어난 아이들의 겨드랑에
깃털 달아 주어 하늘로 돌려보내며
저주했지
날개 없이 태어난 운명을

그리고

아이 낳은 적 없는 여인의 하반신에
비늘과 꼬리지느러미를 조각해 수장(水葬)하고
절망했지
물을 숨 쉬는 아가미가 없음을

불과 화살촉

이전부터 새는 허공을 날고
물고기는 이미 생을 완성했는데

우린 여전히 떠돌고 있지
그건 처음부터 우리가 아니었는데도

날개와 지느러미
그 추락과 침몰의 시간을
여전히 여행 중이지

아, 그런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천사가 된 아이들과 인어 여인의 전설은
우리가 언제부터 연습한 비극이었을까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너 아직 거기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칸트의 산책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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