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백애송

마루안 2021. 5. 12. 21:38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백애송


출생지가 불분명한
일렬로 늘어선 근조 화환
제 무게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한다

환한 불빛 아래 잿빛 그림자들

돌아가는 술잔은 채워지지 않고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로의 말에 서툴기 때문에

가만히 한쪽 날개를 토닥일 뿐

날아갈 수 없는 무게만
가슴 한편 차곡차곡 쌓인다

생활이 지나간 자리에
어려풋이 남은 자국은 희미했다

당신이 없어도
고구마 줄기는 서로 엮여 자라고
푸성귀는 무성해질 것이다

다른 한쪽 날개가 파드득거렸다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걷는사람

 

 

 

 

 

 

미니멀리즘 - 백애송

 

 

목록을 작성한다 버려야 할 것들은 어제의 마음가짐과 오늘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한 잎이었다가 두 잎이 된다

 

다시 오는 봄엔 손잡고 모래 위를 걷자고 했던 일 서류봉투의 뒷면부터 쓰기로 했던 일 끝에서부터 치약을 짜기로 했던 일 신발에 발을 함부로 욱여넣지 않기로 했던 일

 

지키지 못했던 약속과 빗나간 단어들 절반도 채우지 못한 유리병 자존심 한 톨과 고집 한 스푼은 여전히 대치 중이다 목록을 내려놓는다

 

베란다에 내어둔 화분 꽃송이 툭, 꺾이는 소리 가로수길 위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의 흔적들 한 우주도 거기, 그렇게 내려놓고 간다

 

 

 

 

*시인의 말

 

꽃을 보러 갔다가

앞사람의 발자국만 보고 왔다

 

뜨거운 기운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꽃을 보러 갔다가

꽃송이는 없고

 

떨어진 나만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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