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연애의 그늘 - 박연준

마루안 2016. 8. 2. 08:02



연애의 그늘 - 박연준



내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질 때
입술은 위로 위로 흐르리
역방향으로 흐르는 비틀린 빨강이
허공에 핀 찰나의 꽃이라고 생각하리

포옹이 오래 고이면
몸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손가락은 사물을 가리키는 막대로 전락하고
손톱은 가장 딱딱한 미소를 짓는다
소리가 나지 않는 사고라니,
누군가 봄을 꺼버렸다


동공 없이 뻥 뚫린 눈알 속에
개구리들이 알을 낳고, 알들은 곧 썩는다
식탁 위 음식들은 왜 모두 죽어 있을까?
백 년을 씹어도 삼킬 수 없는 질긴,
가죽 같은 시간이 있을 뿐
열렬한 잠 속엔 환영이 없다


깡마른 유령 둘이 사다리 위에 앉아
톡, 톡,
손톱을 깎고 있는 풍경


오래 생각하면 어둠도 늙는다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봄비가 차마, 귀(耳)가 되어 내리는 - 박연준



깨금발로 가벼이 내리는 봄비
뒤척이던 봄의 땀방울일까
아홉 개의 귀를 삼킨 흐르는 봄아


등걸잠 자던 옛 애인은
벚꽃 아래 숨어서 늙지도 않고
파랑이 됐다가, 수의(壽衣)가 됐다가,
입김이 됐다가, 봄이 되어 내리나
쇳물처럼 붉게
녹을 품고 내리나


당신-이라는 테두리에 스민 철없는 마음
들릴까, 어쩌면 들릴 수도 있을까
속절없이 눈 감은 숨은 별들아


바스러진 봄 귀(耳)가 하나, 둘, 우수수
꽃잎처럼 사뿐히 떨어지며는
내리나 당신, 붉게 흘러내리나


봄 그림자 넓게 지나가는 밤
모르고 활짝 핀
밤의 귀들아
눈 감고 실컷 뛰어다니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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