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누가 오어사(吾魚寺) 가는 길을 묻는다면 - 정일근

마루안 2016. 8. 2. 23:10



누가 오어사(吾魚寺) 가는 길을 묻는다면 - 정일근



누가 오어사 가는 길을 묻는다면
마음이 내어주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해주리라


때가 되면 갈아야 하는 소모성 부품처럼
벌써 삶에서 너덜거리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오고
일박의 한뎃잠으로도 쉽게 저려오는 가장의 등뼈


점점 멀리서 보아야 선명히 보이는 두 눈과
여기저기 돋아나는 불가항력의 흰머리카락
폄이 있으면 굽힘도 있음을 아는 굴신(屈伸)의 세월이 찾아와
아침 술국의 뜨거움도 가슴속에선 서늘해지는
어느새 그런 나이에 접어들었네


오래지 않아 불혹의 생이 찾아오려니
벼랑 사이 외줄에도 기우뚱거리지 않고
한 점 미혹 없이 걸어갈 수 있으랴
오전이 다 지나가고 오후의 시간이 시작되는 꽃밭에서
나는 어떤 향기와 색깔로 다시 피어날 수 있으랴


지치고 남루한 육신 자루를 동해 바닷가에 널어놓고
마음의 물고기를 따라 오어사 찾아가는 길


불혹 지나 지천명, 지천명 지나 이순
세월의 물살 유유히 헤엄쳐
저물기 전에 산문에 닿을 수 있다면
오어사 대웅전 빗꽃살 문양의 연꽃처럼
고색과 창연으로 나는 활짝 피어날 수 있으려니


누가 오어사 가는 길을 묻는다면
싱싱히 살아 앞장서는
내 마음의 물고기 한 마리 보여주고 싶네.



*시집, 경주 남산, 문학동네








어떤 세월 - 정일근
-취재 수첩



예고 없이 자신의 책상이 치워져버린 사람을 알고 있다
그의 생은 불혹을 지나 지천명의 나이로 순탄하게 진입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등 떠밀려 하루아침에 도중하차했다
그날 아침으로 책상 서랍은 깨끗이 비워졌고
그의 인사(人事)는 잠시 잠깐 이 도시의 화제가 되었지만
그는 곧 잊혀졌다 세상의 관심은 책상과 의자의 새주인이었을 뿐
누구도 그의 절망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잊혀진 채 1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 사이 여러 대통령이 바뀌었듯 그가 비워준 의자의 주인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명예 퇴진이 새삼 세상의 화제가 되었을 때
나는 물었다; 그때 맞딱뜨린 심연은 얼마나 깊었는가
깊은 우물 속 같은 세월을 타고 오른 두레박은 무엇인가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칼들을 보여주었을 뿐
그의 손으로 쇠를 갈아 만든 날카로운 칼들과
오랜 무두질로 한없이 부드러워진 가죽 칼집
칼날은 하나같이 바람이라도 벨 듯 날이 서 있었지만
두툼한 칼집 속에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권력이었던 큰 책상과 명예였던 등받침이 높은 의자에서 밀려나
굴욕의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갈고 갈아 날을 세운 뒤
다시 마음의 칼집 속에 잠재운 세월, 그의 세월을
한 가방 가득한 칼들이 그를 대신해 들려주었다
그의 생은 지천명을 지나 이순으로 여전히 편안하게 이어졌고
그의 삶은 결국 자신의 등을 떠밀지 못했다
이 도시에서 그가 다시 이룬 성공과 명예보다도
그가 다시 마련한 새로운 책상과 존경의 의자보다도
그의 칼은 빛났고 세상 어느 누구의 세월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를 버린 그 책상과 의자는 여전히 누군가를 내쫓고 다시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