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마음의 순력도 - 현택훈

마루안 2018. 2. 9. 23:25



내 마음의 순력도 - 현택훈



내 마음의 순력도를 펼쳐놓고
현재 나의 경로를 짚어봅니다
청포도가 있던 집이 있던 곳에서
기억의 환해장성이 드리운 섬까지
순력도를 그리며 삽니다
동복삼거리, 민방위훈련 때문에 정차한 차들,
시외버스 차창 밖 표정은 나른한 평화,
죽은 누이의 치마 같은 가을 햇볕.
일주도로처럼 내 마음속을 나는
까마귀 한 마리 있어
나는 포수가 되고 싶지만
외로운 성을 혼자 지키는 포졸인걸.
버스는 정의현을 지나 사귀진까진 갈 것입니다.
핸드폰을 켜 지난 문자들을 확인합니다.
-어쩌면 우주의 수명은 내리는 빗방울 수만큼일 것 같아.
-우주가 자동차 바퀴들 사이에서 촤아아악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있네요.
비 오는 저녁 퇴근길 짙은 피로가 만들어낸 발신과 수신.
문자의 순환이나 수요일의 심야영화나
토요일의 제주소년 블루스나
모두 허세집(虛勢集)에 기록될 작은 섬일 뿐이지요.
더 이상 발 디딜 수 없는 포구에서
돌아서듯 살아온 시간들.
저어새는 연해주까지 날아가고
택시를 타면 공항에 갈 수 있는데
제주시청 목관아 술집 골목으로만 모이는 마음이여.
-오늘 밤엔 빗소리가 있으니 음악을 틀 필요가 없겠어.
문자를 입력했다가 지워버립니다.
마음은 언제나
명진슈퍼에 간장 사러 가는 거리 즈음
멀리 가지 못하고,



*시집, 남방큰돌고래, 한국문연








겨울 소주 - 현택훈



폭설로 길이 끊긴 산중이면 좋겠지만
겨울 읍내 선술집에서 소주를 마셨어라
산판일도 없는 겨울,
툭 불거져 나온 힘줄이 머츰했어라
겨울 실내적정온도와
소주 알코올 도수는 같은데
유리창에 낀 성에가 은종들처럼 아련했어라
내리려면 함박눈이 내리지
작업복 찌든 더께 같은 진눈깨비만 흩날렸어라
봉화댁의 앞치마엔 기름이 잔뜩 묻어 있어
그 기름이 얼굴 누런 사내들의 선지피인데
사내들은 가마솥처럼 둥근 엉덩이에 대고 농일 치며
겨울 읍내의 저녁이 저물어갔어라
찌그러진 냄비에 담긴 조림 속 고등어와
나의 처지가 같은 것 같아 마음이 떼꾼해졌어라
내 고향에도 푸른 바다가 있어라
드르륵 선술집 문 여는 소리에
안에 있는 몇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아져
그리운 시선만큼 따뜻한
마음적정온도가 겨울 소주였어라
외로운 시선만큼 따뜻한
마음적정온도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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