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곳에 가려는 자들 - 김충규

마루안 2018. 2. 12. 19:30



그곳에 가려는 자들 - 김충규



그곳에 이른 자 아직 없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자들이
그곳을 향해 집을 떠났다
가다가 지쳐
주저앉아 그대로 돌이 된 자도 있다
돌에 등을 기대고 잠시 쉬는 순간
돌의 울음소리에 놀라
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자도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혼자만의
지도를 몸 속에 지니고 있다 또한
나침반과 가득 채워져 있는 물병,
짊어진 배낭 속엔 한 줌의 소금
그러나 안내자는 없다 그곳에 이른 자 없으므로
집을 떠나온 자들은 오직
홀로 걸어갈 뿐이다
군데군데서 만나는
돌이 된 자들의 울음소리에도 끄떡없이
무심히 걸어가는 자도 있지만
그곳이 과연 있긴 있는지 의심스러워
막 신던 신발을 벗어놓는 자도 있다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천년의시작








그 길 - 김충규



그 길을 가보았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길을 걸을 때
하늘엔 별이 칭얼거리고 땅엔 꽃이 피는지
궁금했으나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기처럼 엉금엉금 기어가야 하는지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지
혹은 뛰어가야 하는지
막상 그 길에 접어들면 어떻게 가야 할지
나는 아직 나의 자세를 정하지 않았다
그 길에서 잠깐 책을 읽을 수 있는지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지
혹은 술을 잠시나마 마실 수 있는지
그 길의 끝에 이르면 어떤 광할한 대지가 펼쳐지는 것인지
동굴이 아가리 벌리고 있는 것인지
벼랑이 누워 있는 것인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준비도 없이
그 길을 즐겁게 갈 수 있을까
그 길을 걸을 때
향기로운 노래가 들린다면 나 춤을 출까
슬픈 노래가 들린다면 나 울음을 울까
그 길에 이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볼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아뿔싸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시집, 물 위에 찍힌 발자국, 실천문학사





# 김충규 시인은 196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98년 <문학동네> 문예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물 위에 찍힌 발자국>,  <아무 망설임 없이>, <라일락과고래와 내 사람>이 있다. 수주문학상과 미네르바 작품상을 수상했고 <문학의 전당> 발행인을 역임했다. 2012년 마흔 일곱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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