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모든 출구가 막히기 전에 - 윤의섭

마루안 2018. 8. 5. 22:00



모든 출구가 막히기 전에 - 윤의섭



그 지하상가는 저번 꿈속보다 조금 변했지

가끔가다 똑같은 장소에 가 있는 꿈

이번에는 지하상가에서 지상으로 가는 길이 하나 막혔지

그곳이 어딘가에 실존하리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곳을 찾아내기엔 삶은 너무 생생해

꿈속에서는 항상 레코드 가게에 들르지

가게 주인은 고교 시절 마음을 설레게 하던

단골 레코드 가게 주인 얼굴을 닮았고

그녀 앞에 서면 꿈속에서도 야릇해지는 기분

꾸불꾸불한 지하상가는

어쩌면 몽정으로 이어지는 부끄러움의 긴 여정일지도

그곳이 꿈을 꿀 때마다 변하지

사라지는 길 탈바꿈하는 가게들

컴컴한 통로를 배회하는 사람들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가 점점 막히는 세계

내 생애가 무너질수록

그곳은 복원할 수 없는 유적이 되어가지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 앞에서

나는 주저해야 했지

이제 모든 출구가 막히면

죽음보다 슬픈 무덤에 순장되는 거지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문학과지성








명왕성 - 윤의섭



거대한 달이 서쪽에 떠 있다

항상 거대했다

소원을 비는 사람은 없었다

소원 비는 달을 본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이곳은 유배지다

벼락 맞은 나무 밑에 옛날

촛대를 세웠던 사람도 있었다

산 너머엔 어디서 떠나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집이라고 여기는 곳에서 매일 쓰러져 눕는다나

밤이면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귀를 기울인다

어떠한 소식도 내키지 않았다

달이 떠오르면 이상하게도 수신기들은 지직거렸다

요절했다는 가수의 노래가 들린다

지난날을 읊조리는 목소리가 앵앵거린다

어느 순간부터 성장은 이미 멈추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금세 슬퍼지곤 했다

소원이 너무 많았지만

밤하늘엔 유성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서쪽에서 거대한 달이 하나 떠올랐다






# 지인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자주 놀렸다. 오늘 밤 못 넘길 것 같아요. 시골 형수의 연락을 받고 곧장 어머니께 달려갔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가늘어졌던 숨소리가 다시 생생해졌다. 구십 살을 채우시려나. 어머니의 잦은 호출에 조금씩 요양병원에 모셨던 죄송한 마음이 희미해졌다. 지독하게 무더운 날씨에 장례치를 자식들을 걱정했을려나. 며칠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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