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 소년이 지나갔다 - 김점용

마루안 2018. 8. 3. 21:24

 

 

한 소년이 지나갔다 - 김점용


저만치서 한 소년이 마주 오고 있었다
더벅머리에 교복을 입고 검은 가방을 메고
흰 양말에 삼디다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불량한 걸음걸이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주머니 깊이 두 손을 찌르고
껄렁껄렁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구나 저럴 때가 있는 법이지
굴러다니는 빈 깡통을 콱 찍어 차버리듯
세상을 온통 찌그러뜨리고 싶은 시절
어이 학생, 한마디 해줄까 망설이는 사이
소년이 나를 툭 치고 지나갔다
가볍게 툭,
뽀얀 젖살 같은 얼굴로
야릇한 오징어 냄새를 풍기면서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가볍게 툭,
날 고의적으로 들이받고 지나갔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걸어 날 때려눕힌 뒤
새파란 주머니칼로 온몸을 난자하고 
팔딱이는 내 심장을 꺼내 갔다
가볍게 툭,
오래 오래전에 한 소년이 지나갔다


*시집, 메롱메롱 은주, 문학과지성

 

 

 

 

 

 

먼 저 달 - 김점용


갯가 촌놈들 아니랄까 봐
청량리 수산시장에서 비린내 맡고 살 비린내도 그리워
붉은 등불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는데
다락방 같은 붉은 어둠 속에서
그러나 몸 섞지 않은 건
내 그것이 서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쭙잖은 페미니스트여서가 아니라
멀리 있는 애인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라
그냥,
그냥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녀는 날 자꾸 의심했지, 할 거면 빨리 하자고
자기도 장사해야 하니까 잡담으로 시간 끌지 말자고
나는 김중식의 시집을 꺼내 라이터 불로
<食堂에 딸린 房 한 칸>을 축축하게 들려주었는데
그녀는 나랑 연애하고 싶다며 보채다가
묻지도 않은 먼 고향 얘기며 가족,
팬시점 주인이라는 장래 희망을 나직나직 들려주었는데
그녀에게 시집을 안겨주고
삐걱삐걱 목조 계단의 불안한 음계를 따라 나와
툭 터진 하늘 올려다볼 때
먼저 나온 친구 녀석 퉁명스럽게
짜식, 디게 오래 하네
그래 임마, 저 달도 나한테 걸리면
오늘 밤 못 진다!
먼 저 달




# 김점용 시인은 1965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서울시립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