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바다 - 권혁소
나 그대의 바다에 선다
그대 잔잔한 어깨 너머로
쉼 없이 파도가 밀여와서는
끝내 하얀 포말로 가라앉으며
그대의 귓불을 핥고 발을 적시고
서로 다른 우리들 유년의 기억을 데리고
다시 난바다로 간다
아, 저 벅찬 몸부림
나 그대의 바다에 왔다
물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 몸을 부딪는,
마치 우리들 노동의 역사를 닮아 있는 저 파도는
그래서 점점이 작아지는 사랑의 시간을
아파하는 것이다 아파서 저리
희고도 희게 부서지는 것이다
경험 없는 혁명 같은 사랑이
어느 날 문득 내게 왔듯
그대의 바다에도
못 이룰 꿈 하나 성글게 자라고 있었다
*시집, 아내의 수사법, 푸른사상사
결혼 기념일에 - 권혁소
나도 아내의 것은 아니고
아내도 내 것은 아니다
서로를 닮은 씨앗 하나 뿌리기 위해
잠시 서로를 빌렸을 뿐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손을 잡고 시장에 가기도 하고
잡은 손에 땀이 차면
각방을 쓰기도 하면서
어느덧 이십 년
다른 이에게 우리 서로를 임대하기에는
몰라도 될 것까지 너무 많이 아는 사이가 되었다
# 권혁소 시인은 1962년 강원도 평창 진부 출생으로 1984년 시 전문 무크지 <시인>에 작품을 발표하고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논개가 살아온다면>, <수업시대>, <반성문>, <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다>, <과업>, <아내의 수사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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