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낙엽은 사선으로 진다 - 정소슬

마루안 2019. 10. 29. 22:31

 

 

낙엽은 사선으로 진다 - 정소슬 


한창일 때는 하늘만 우러러 
제 몸 허공에 떠 있는 줄 까맣게 몰랐었는데 
그러니 현기증도 당연히 몰랐었는데 
하늘의 눈빛 돌연 써늘해져 시력이 쇠하고 
기억도 차츰 흐릿해져 
아아 떨어질 날 가까웠구나 이제야 시선 내리깔고 
아래를 보니 전신으로 번져오는 현기증에 
몸 가누기조차 힘이 겹구나 
저 아래 땅을 기며 아장거리던 유년의 기억이 
땅거미가 되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데 
그간 이 높은 곳에서 어떻게 산 건지 꿈만 같아 
도무지 겁이 없었어 겁도 없이 
수직으로의 욕구만 꾸역꾸역 쌓아 올린 거야 
현기증의 높이만큼 떨어질 것을 걱정해야 하는 
이 지경에 와서야 과욕을 깨달아 
그간 쌓아 올린 수직선을 사선(斜線)으로 허물며 
진다... 진다... 수평선 되어 드러눕는다 
다소곳 사선(四禪)의 품으로 입적한다 


*시집, 걸레, 도서출판 작가마을

 

 

 

 

 

 

상강 즈음에 - 정소슬
-차마 부를 수 없었던 노래 1


독한 가난에
일찍이 접어야 했던 문사(文士)의 꿈

길은 만 갈래, 겹겹 낯선 길에서
이 길이려니 들어선 길이 엉키고 꼬여
불의 사고에 이립을 망치고, 병상에서 불혹을 맞아
지천명 가까워서야 수구초심 향리로 회귀
도도한 묵향의 목침으로 고쳐 베었으나
여태 살아온 행적들과의 괴리가 깊고 아득하여
드리운 내 수구垂鉤(낚시) 끝에는
연일 물고기들 낯가림만 일렁댈 뿐

어즈버 어즈버 이순도 지나
망칠(望七)의 몸 굽어보며
자손에게 물릴 족자 한 폭이라도 남겨야지, 하는
다급해진 수구(秀句)에의 갈망이
날로 성성해 가는 서릿발에
발꿈치만 자꾸 도두 세우는구려

 

 

 

 

# 정소슬 시인은 1957년 울산 출생으로 본명은 정정길이다.  <주변인과 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속에 너를 가두고>, <사타구니가 가렵다>, <걸레>가 있다.  한국작가회의, 민족작가연합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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