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풍 드는 법 - 김남권​

마루안 2019. 10. 27. 18:25

 

 

단풍 드는 법 - 김남권​


단풍이 들면 나는 가슴이 젖는다
투명한 물속에서 핏물이 번지듯
한방울의 피가 섬처럼 떨어져
온몸을 밝히는 동안,
혈관 끝에 다다른 가을이 더듬더듬 울음을 쏟아낸다
햇살 하나로 백일 이백일 삼백일을 지나야 붉어지는 너는
백년을 두고 바라보아도 지치지 않을 작은 풀꽃이지만,
내 가슴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꺼지지 않고 내려온 한 잎의 불씨였다
일 년에 한 번, 제 몸의 뿌리부터 불을 질러
아낌없이 태우는 나무에
풀꽃은 운명의 불씨였던 것이다

 

한순간의 절정을 책망하지 마라
얼마나 절실하면 해마다 저를 책망하며 불씨를 되살리겠느냐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뜨거운 불길을
그렇게라도 쏟아놓지 않으면
홀로 까맣게 죽은 피를 토하다
하얀 물안개로 피어나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뿌리 끝까지 붉게 타올라야 내 혼도 깨어난다
제 몸 안에서 모닥불 하나도 지피지 못하는

사랑은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나무가 심장부터 붉어져 온몸이 단풍드는 것처럼,
누군가의 심장을 불태우려면
내가 먼저 남김없이 타올라야 마침내 같은 물이 드는 것이다

 

 

*시집,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밥북

 

 

 

 

 

 

만행 - 김남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아침마다 길을 나선다

익숙하고 다정하고 오래된 길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거리 신호등을 건너고 편의점을 지나고

시장 뒷골목을 천천히 걸어서 터미널로 향한다

동서울 가는 직행 표를 끊거나

영월 가는 시내버스를 타기도 한다

정말이지 버스를 타는 순간에는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기약 없이 익숙한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지 십오 년 이젠 돌아오지 않을 때도 된 것 같다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동안, 나는 쓸쓸해진다

별이 마중 나오지 않는 길을,

그리움이 컴컴해지도록 터벅터벅 버려진 발자국을

더듬어 간다

내가 가지 않은 길은 밤새 비어 있을 것이다

갈 곳 잃은 달맞이꽃만 이십 년 전 그 길을 걸어 나와

허기진 달빛을 받아먹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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