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 연기 - 안성덕

마루안 2019. 10. 29. 23:10



저녁 연기 - 안성덕



사람의 마을에 땅거미 내려와
동구 밖에 서성거린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식구를 기다리나,


어머니는 머릿수건 벗어 어깨에 묻은 검불 같은 어스름을 탈탈 털었다
가마솥에 햅쌀 씻어 안쳤다 모락모락 연기 피워 올렸다
시월 찬 구들장을 덥혔다


워 워, 외양간에 누렁이를 들이고 아버지는
꼬투리 실한 콩대 몇 줌을 어둔 작두에 욱여넣었다 쇠죽을 쑤었다
산달이 가까워진 소, 푸우 푸 콧김을 뿜으며 워낭을 흔들었다


어스름처럼 고샅에 밥내가 깔리면, 어슬렁, 들고양이가 기웃거리곤 했다
솎아낸 텃밭 무로 생채를 무친 어머니
아버지 밥사발에 다독다독 고봉밥을 올렸다
졸을 텐디, 두런두런 남은 국솥의 잔불을 다독였다


아무 집이나 사립을 밀면, 막 봐놓은 두레밥상을 내올 것만 같은 저물녘
들어가 둘러앉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컹컹 낯선 사내를 짖는 검둥개가 금방이라도 달려 나와
바짓가랑이에 코를 묻을 것만 같다
잘 익은 감빛 전등불은 옛일인 듯 깜박거리고
저녁연기 굴풋하다



*시집, 달달한 쓴맛, 모악








순대 - 안성덕



간 쓸개 다 빼내서일까, 늘 허기다 빈속에 지범거리는 반쪽 생마늘 아리다 꿔다가도 한다는 소한 추위보다 맵다


죽어도 먹어야 한다는 듯 한번 먹은 건 절대 싸지도 게우지도 않겠단 다짐인 듯 터지게 밀어 넣고 주둥이 똥구멍 꽉 동여맨 순대


짠 새우젓국 찍어 한입 우물거린다
팔뚝 걷고 제 피 뽑아먹은 허삼관처럼 빈창자 채우러 제 멱을 따 콸콸 더운 피를 쏟았을 돼지,


볶은 간 한 접시에 데운 황주 두 냥, 아니 덤으로 얹은 삶은 간 두어 점에 한 잔 소주로 꾸역꾸역 피를 만드는 퇴근길


들보 빼내 서까래 얹고 서까래 걷어 들보 지르고 이달에만
언 발에 눈 오줌이 벌써 두 번, 목도리 없는 목이 허전해 넥타이 고쳐 맨다 풀린 구두끈 다시 묶는다


취하지는 않고 무심결에 베어 문 청양고추가, 맵다 이런 돼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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