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금 이 가을, 고맙다 - 황동규

마루안 2019. 10. 30. 19:57

 


지금 이 가을, 고맙다 - 황동규

 


산책길 언덕 양옆에 의젓하게 자리 잡고 선
자작나무들의 하얀 피부,
허나 지난 장마에 땅이 패어 길 위에 올려져
인간의 발길에 뭉개진 험상스런 뿌리들이 더 눈길을 끈다.
밖으로 나온 나무의 창자들,
땅속에서도 속은 속대로 썩혔는지
군데군데 쥐어짜듯 잘록해진 곳도 눈에 띈다.
내 창자도 꺼내보면
사람들 눈 돌릴 만큼 험상스럽지 않을까.


그러나 잠깐, 그건 그거고.
햇빛 가운데도
눈부신 이 가을 햇빛,
노란색보다 더 샛노랗게
길 양편을 색칠하는 저 은행잎들,
갓 말린 태양초 꼬리를 달고
맴도는 저 고추잠자리들,
산사나무 잔가지에 붙어 가볍게 산들대는
풍뎅이 등의 저 절묘한 녹갈색 광채,
하늘에는
몸 가볍게 줄이고 춤추듯이 흘러가는 구름 조각들.
고맙다.


밤에는 별빛이 서늘하다.
뇌 해마에서 별자리 이름들 많이 증발했지만
별들은 자리 뜨지 않았다.
천천히 흐르는 거대한 은하를 머리 위에 두고
맑게 존다.
깜빡, 눈 막 그친 희한하게 투명한 하얀 아침이
언뜻언뜻 뇌에 비친다.

 


*시집, 연옥의 봄, 문학과지성

 

 

 

 

 

 

외등(外燈) 불빛 속 석류나무 - 황동규

 

 

땅거죽에 가까워지면서 간지럼 타는 눈송이들의 살갗
어둠 속에서
그 간지럼 전하는 공기의 미진동(微振動).
그걸로 온몸 마사지받으며 잠드는 밤은
지구가 한 번쯤 거꾸로 돌아도 좋은 밤이다.


종일 흐리고
내릴 듯 내릴 듯 눈 기어이 내리지 않은 채 밤에 든
남해안 바닷가 여관집,
멀리는 못 가고 머뭇대는 외등 불빛 속에
둥치 험하게 찢긴 헐벗은 석류나무
가파르게 뒤틀린 겨울 골짜기처럼 서 있다.
유리창은 사이하고
그의 잔기침 참는 부정맥이 피부로 느껴진다.
한번 간 술맛이 돌아오지 않는 밤, 허나
혼자 깨어 있지 않는 밤이다.

 

 

 

 

# 황동규 시인은 1938년에 평안남도 숙천에서 황순원 소설가의 맏아들로 태어나 1946년에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대 영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미국 뉴욕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즐거운 편지>를 포함한 시 3편이 서정주 시인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겨울밤 0시 5분>, <꽃의 고요>, <사는 기쁨>, <연옥의 봄>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김종삼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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