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투명 - 하린

마루안 2020. 3. 20. 22:00



투명 - 하린



인공 눈물을 화분 속에 떨어뜨리고

싹트길 기다려 볼까요

개밥바라기별을 처음 사랑한 사람이 나였으면 하고

서쪽 하늘이 무표정을 버릴 때까지 우는 시늉을 해 볼까요

혼자 밥을 먹는데 익숙해지는 허무를 위해

D-day를 표시하며 하루에 세 번 웃어 볼까요

바짝 마른 그리움을 풀어 국을 끓이고

숨이 적당히 죽은 외로움을 나물로 무쳐 내고

꼬들꼬들한 고독을 적당히 볶아 식탁을 구성해 볼까요

빈 의자와 겸상해 볼까요

자, 이제 주말 연속극이 시작됩니다

고지식한 시어머니나 파렴치한 악처를 옹호해 볼까요

두 사람이 짧은 식사를 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긴 식사를 하는 것이 

더 낭만적이라고 다짐해 볼까요

입맛을 다시거나 잃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독백을 방백처럼 늘어놓으며 

접시를 지속적으로 더럽혀 볼까요

다리를 떨면서 신문을 봐도 

먹기를 멈춘 채 눈물을 흘려도 

잔소리할 사람 없습니다

시계를 보며 과장되게 늦은 척을 해 볼까요

예감이나 확신을 믿지 않게 해 준 당신

공백은 있어도 여백을 찾을 수 없게 만든 당신

오늘 차려 놓은 투명한 기척, 눈물 나게 웃으며 먹어 볼까요



*시집,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흑맥주의 밤 - 하린



1.


절망아, 가끔 3초쯤 나를 놓쳐도 좋았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충실하다니

나는 중지된다

나는 분리된다


모든 절망에 후일담이 있다면

절망 속에서 숨을 참는 마지막 종족이 될 거다


나를 귀찮게 했던 예감들

나를 피곤하게 했던 위로들


나를 책임지지 않을 한숨만 득실거리니

아침엔 1인분의 후회만 있어도 좋았다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절망은 노련하니까, 치밀하니까



2.

지금쯤 당신의 검정은 완성되었는가

검정을 완성하기 위해 흑맥주를 마신다면

언제쯤 완전하게 우리는 더러워질 수 있을까


잔에 가득 담긴 이것은 시커먼 어둠이 아니라

새까만 좌절이다


당신 안에 거주하던 사내 혹은 여자가 담뱃불로 긴 불면을 지지고 있다면

삭을 대로 삭은 체념을 난간에 걸쳐 놓았다면

충혈된 눈동자가 끓어올라도 당신은 함부로 뛰어내릴 수 없을 거다


도대체 무슨 악연인가

하루 종일 검정이 당신을 따라다닌다

날씨가 되고 배경이 된다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미 충분히 발효되고 있는데

통증을 감내하기엔 당신 안에 거품이 풍부하게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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