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적막 - 고영민

마루안 2020. 3. 23. 21:35



적막 - 고영민



매년 오던 꽃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
꽃 없는 군자란의
봄이란


잎새 사이를 내려다본다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어찌 봄이 꽃으로만 오랴마는
꽃을 놓친
너의 마음이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 송이 머리에 이고 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뿌리로부터
흙과 물로부터 오다가
끝내 발길을 돌려
왔던 길 되짚어갔을
꽃의 긴 그림자



*시집, 봄의 정치, 창비








봄의 정치 - 고영민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
얼음이 풀린다
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
떨지도 않고 걷는다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
따뜻한 눈송이들
지난겨울의 노인들은 살아남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단단히 감고 있던 꽃눈을
조금씩 떠보는 나무들의 눈시울
찬 시냇물에 거듭 입을 맞추는 고라니
나의 딸들은
새 학기를 맞았다






# 우울한 봄이다. 난데 없는 전염병으로 모든 사람들이 입을 가렸다. 그 사이를 뚫고 예년보다 빨리 봄이 찾아왔다. 양지 바른 곳에 노란 개나리가 옹기종기 모여 봄볕을 즐기고 있다. 많은 것을 바꿔 버린 일상이다. 곧 만개할 봄꽃들도 한 열흘 황홀함을 즐기고 떠날 것이다. 떠나는 봄꽃 따라 전염병도 어서 떠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울한 봄이지만 더욱 소중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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