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과와 양파 - 김이하

마루안 2020. 3. 31. 21:59

 

 

사과와 양파 - 김이하


햇살이 들다
고개를 꺾고 기웃거리는 창가에
한 알 남은 사과는 한 달도 넘게 뒹굴거리던 것이고
두 알이 남은 양파는 한 달이 못 된 것이다

국을 끓이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혹은 생으로 먹어치울 식욕도 없이 그렇게
내 삷은 흘러왔던 것이다

사실 그것들이 검정 비닐 봉지에 담겨
삼층으로 마지못해 올라올 때도
뚜렷한 목적을 붙인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이들은 그 창가에 놓였고
햇살이 애를 닳고 목을 꺾게 한, 오히려 그들의 생존이
더 간절하게 똬리를 튼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오, 간절한 시간들

언덕배기를 오르던 아버지의 굵은 종아리 스러지고

한꺼번에 허물어지던 어머니의 무릎
애인에게서 퐁겨 오던 그 단내 나는 시간들마저
의지가지없던 긴 세월

 

그러나 삶은 또 한 번 온다

간절한 가슴팍에서, 저 깊은 울음의 늪에서

사라진 아버지의 종아리 틈에서, 어머니의 꺾인 무릎에서

늙어 버린 애인의 시간은 지나가고

살아야 할 삶은 바동거리며 남는다

햇살이 시다

 

 

*시집/ 그냥, 그래/ 글상걸상

 

 

 

 

 

 

울컥 - 김이하

 

 

아프다, 오래오래

가슴 깊은 곳에서 시고 쓰린

오물이 넘어오고

생선보다 더 비린

피 냄새가 난다

 

이 땅에 살다가

몹쓸 짓에 휩쓸려 죽어 간 사람들

하나하나 이름 다 부를 수 없는

내 어수선한 머릿속으로

사람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나는

울컥, 눈물을 길어올린다

 

마르지 않는 지하수처럼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끌어올리는

울컥이라는 마중물

피할 수 없는 그것, 그래서 사람이라는

곤혹(困惑)

 

문득 버스 창에 얼비친

한 그림자 쓸쓸할 때

와락, 안아 주고 싶은 사내의 등

버스에서 내려 보면 그 차창엔

멍한 내 눈동자만 박혀 있다

 

 

 

 

*시인의 말

 

벽에 기댄 풀 그림자--

한 줌도 안 될 흙부스러기 틈에 뿌리박고

바람받이에 온몸 휘청거리는 저곳

나는 어쩌자고 이 길로,

비루한 외길로 슬쩍 빠져 버렸던가

그러나 어쩌랴, 이제 갑자(甲子) 돌았으니

타박타박 걸어온, 이 나선형 궤적을 돌아

또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저 벽에 기대어

스스로 미움을 삭이면서, 빛을 새긴다

햇살이 잠시 드리워 주던 그림자

희미한 내 모습을 새긴다

또 어쩌자고 강퍅한 벽에

맨몸 하나 걸어 둔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우절 - 성동혁  (0) 2020.04.01
종이배를 접지 못하여 - 박서영  (0) 2020.04.01
이슬이 맺히는 사람 - 정호승   (0) 2020.03.31
꽃잎 속에 이우는 시절들 - 곽효환  (0) 2020.03.30
일찍 일어난 새 - 이학성  (0) 2020.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