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지러운 길 - 황규관

마루안 2020. 5. 28. 21:30

 

 

어지러운 길 - 황규관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단 하나의 길이 아니다
골목길은 큰길과 함께 있고
큰길은 오솔길이 없으면 무너진다
그래서 한때는 큰길이 열리고
저물녘이 되면 슬그머니 뒷길이
밝아지는 것이다 오솔길을 가다가
눈부신 머리카락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소음 가득한 큰길로
다시 내딛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여러 길이 아침저녁으로
수십 년의 간격을 두고
교차하고 나란히 가고 갈라지고
뒤로 갔다 옆으로 쓰러지다
뭉치고 풀어지다 끊어지다 이어진다
어느 날 해일이 되기도 한다
길은 이념이 아니라, 걸으면서
웃는 웃음이며 걷다가 빠지는 수렁이며
수렁에서 슬픔의 힘으로 바라보는
깊은 하늘이다
떠나지 않는 절망이다
길은, 그래서 꺼지지 않은 숨소리이고
발걸음을 생산하는 어둠이다

 


*시집/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문학동네

 

 

 

 

 


옛집 - 황규관

 

 

과거가 납빛 같은 회벽일 리 없다
차라리 덕지덕지 자라고 있는 누더기가 존재의 문양이다
빅뱅은,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
새로움을 향한 욕망을
나는 언제부터인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사코 남루로 남은 옛집 앞에서
텅 빈 찬장과 비료 포대를 덧댄 방문과
어머니 손에 들려오던 연탄 두 장과
다음날의 양식인 봉지쌀과
때아닌 죽음 앞에서의 절규는
개발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다
실눈 뜬 벌레였다가 담장 옆 봉숭아였다가
엿장수 리어카에 실린 고물,
결국 한밤중에 배고파 울던 어린 별의 집
그러나 이제는 낡고 허물어져 괴기해진 집
다시 와보니 아직도 회벽이지만
도리어 완고한 회벽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시간을 느낀다
모든 사랑이
생명의 수프에서 시작되었듯
무너지지 않은 옛집의 서까래에는
시커먼 소용돌이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