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작은 주름 하나에도 마음 깃들여 - 김윤배

마루안 2020. 5. 27. 19:17

 

 

작은 주름 하나에도 마음 깃들여 - 김윤배


몸과 마음이 서로 건너다보고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는가 마음이 혀를 찬다

몸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세우고 허물어
혹 몸이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홀로 눈떠 있게 한 것은 아닌가
세우고 허물던 세월 또한 아름다워
몸 속에 세월이 드나들었거나
세월 속으로 몸이 드나들었던 것은 아닌가
세월이 아름답기로는 마음 또한 이와 같아
몸이 시드는 날에도 마음은 꽃술 밀어올려
향기에 취해 있던 것은 아닌가

이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은
마음이 움직여 간 길목이 서럽다 생각하면
몸이 안고 예까지 온 작은 주름 하나에도
마음 깃들여 마음은 몸보다 먼저 아프다


*시집/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있다/ 문학과지성


 

 



봄날은 가고 - 김윤배


네가 나의 모든 이름들을 지우며
슬픈 이름 하나로 왔다 늑골에 걸려 찢기던
목쉰 연가를 지우며 내게로 오던 너는
혹 하염없는 웃음도 지웠는지 몰라
정처 없이 떠돌던 봄을 앓던 너
누구나 아팠던 곳은 아름다운 상처로 남아
영혼 떨게 하므로 네가 지우며 온 것은
나의 이름들이 아니라
너의 아픈 이름들이었을까
아름다운 상처 속에서 꽃 피고
이우는 것이 보인다

오늘은 내가 네게서 이울며 봄날 가고
봄날이 지우는 꽃그늘 아파
나의 늙은 살들 물결처럼 일렁이며
네게 달려가지만 슬픈 이름 하나로
내게 닿아 있는 너를
나는 닿지 못한다


 


*시인의 말

길은 생성이며 소멸이다.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로 드는 길이 있다.
나는 늘 길 위에 있고 길은 내 안으로 깃들인다.
내 시의 생성과 소멸이 이처럼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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