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옥탑, 꽃양귀비 - 이은규

마루안 2020. 5. 29. 21:42

 

 

옥탑, 꽃양귀비 - 이은규

 

 

세상 끝나는 날까지 가난한 자는 있다


성서 속 문장에 밑줄을 긋는 순간
흐르는 구름과 창살 사이


당신은 부끄러울까
일용할 양식 대신 사들고 온 꽃양귀비 모종에 대해
많이 파세요, 드물게 밝았던 목소리에 대해
누군가에게 가난은 명사가 아닌 동사


내일 더 사랑해라는 비문처럼
점점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오래 믿는다
옥탑에서 구름의 투명을 흉내내기
꽃양귀비, 꽃의 말은 망각과 위안이라는데
한나절 현기증의 색에 눈이 멀면
잠시 잊는 것으로 다독일 수 있을까


창살 너머 구름으로 흐르는


가난은 죄가 아니다
죄다
죄가 아니다
죄다


부정할수록 또렷해지는 정답이 있고
우리는 일찍 높은 곳에 오른 사람들
하늘이 보이는 방에 누워 함께 읽은 소설
한 사람과 한 사람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잖아, 생계형 사랑


문득 빗방울, 그럼에도
누군가 쓰러진 자리에서 우리는 일어설 것이다
빛이 어둠으로 부서지는 옥탑에서
없는 꽃양귀비색에 눈멀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인력 - 이은규


해질녘 붉음
저마다 다르게 빛나는 먼지들을
짙은 노을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다


거꾸로 걸어놓은 달력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숫자들
날짜가 맞습니까, 기억이 맞습니까


봄날의 남은 일과는
저무는 것으로 다만 저무는 일


기억이 맞습니까, 벗꽃이 맞습니까
초속 오 센티미로 떨어지는 꽃잎들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을처럼
인력, 모든 물체들은 서로 끌어당긴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가까워지는


기억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워하면 그리워할수록 멀어지는
이상한 법칙에 대해 놀라지 않기로 한다


희미한 살냄새가 묻어나는 연필
지문 가득한 지우개를 만지다가


한 사람과 먼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을
아름다운 법칙에 대해 믿지 않기로 한다
다행이거나 다행이지 않을 뿐


먼지로 흩어져 떠다니다
서로에게 가닿을 마지막 인력에 대해
법칙보다 예감인 해질녘 늦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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