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개망초 - 조성순

마루안 2020. 6. 28. 19:02

 

 

개망초 - 조성순


깊은 산 속 너른 공터
개망초 꽃들 웅성거리고 있다
수천 송이 수만 송이 동무 하고
산 속의 오후를 고즈넉 밝히고 있는 모습
가슴이 서늘해진다.
저 개활지는 한때 사람들이 공들여 농사짓던 터전
농사짓던 사람들
밭이랑에서 너를 보면
재수 없다고 뽑아서 멀리 팽개쳤으리라
억척같은 놈들이라고 둔덕 밖으로 내던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개망초는
눈치 보며 슬금슬금
둔덕에서 개활지로 시나브로 발걸음으로 옮겨놨을 것이다.
살아 보자 할께 살자 엉금엉금 기었을 것이다.
농사꾼들 하나둘 삶의 터전을 도회로 바꾸거나
주소지를 다른 별로 옮긴 뒤
개망초들 슬금슬금
둔덕 넘어 촛불 하나씩 들고
점령지를 밝히고 있다.
벌 나비 불러 모아 잔치를 열고 있다.
사람들이 떠나간 공터
자신들의 의지로 공화국을 만들어
산 속의 하루를 밝히고 있다.


*시집,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KM


 

 

 

 

말무덤* - 조성순


말해야 할 때 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말하지 않아야 할 때 말하는 것
모두
남의 마음을 훔치는 도둑이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을 낚고
말하지 않아야 할 때 말하는 것은
말하는 것으로 사람을 꾀는 것이니
사람살이를 어지럽힌다.
말하는 것도 말이요
침묵도 말이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말하지 않아야 할 때 침묵해야
비로소 말의 온전한 주인이 된다.
쓸 데 없는 말 모아 무덤을 만드니
참 말만 꽃 피어
밝은 세상 이루고
가슴에
부질없는 말 묻으니
오가는 말의 길에
말꽃들 저마다 찬란하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야산에 말무덤(言塚)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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