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동자 하나 없는 섬을 걸었다 - 이원하

마루안 2020. 7. 22. 18:43

 

 

눈동자 하나 없는 섬을 걸었다 - 이원하


말 그대로
눈동자 하나 없는 섬을 걸었다
가을이 서러워서 그랬다

바다는 하늘을 가졌고
때때로 네 얼굴을 가지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저
빈 섬에 몸담은 유일한 슬픔이었다

글이 책에 묶여 있는 것처럼
숲에 묶여 있는 유일한 슬픔이었다

언제 흘렸는지 모르는 네 얼굴을
바다 표면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혼자 있어야 발견될 수 있는 슬픔이었다

혼자 있어서 발견된 질문도 하나 있었다

섬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나

답을 허공에 부탁했을 때
아무런 대답이 없었으므로
내 나름대로 생각해야 했다

생각은 가꿔도 칙칙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기적은 없었다
기적을 바라지 않으니 참을 것도 없었다

빛을 비춰볼 것도 없었다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 이원하


너에게 불쑥, 하나의 세상이 튀어나왔을 때
나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움푹, 꺼져버렸어

그날부터 웃기만 했어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지
원래 어둠 속에 있는 건 잘 보이질 않지

빛을 비추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웃기만 했어

얼마나 오래 이럴 수 있을까
정말 웃기만 했어

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
빈자리의 결핍을 보았어
결핍에게 슬쩍 전화를 걸었는데 받았어,
받았어
결핍이 맞았던 거지

나는 오 년 뒤에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질 거야

그날은
시장에서 사과를 고를 때보다도 더
아무 날이 아닐 것이고
골목을 떠도는 누런 개의 꼬리보다도
더 아무 감정도
별다른 일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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