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뒷모습 - 허연

마루안 2020. 7. 23. 22:27

 

 

내 뒷모습 - 허연


다른 사람 카메라에 찍힌
내 뒷모습을 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필 왜 그때 너는
하얀 부표처럼
천변에 서 있었는지
왜 하필 장마였는지

또 수년이 흐른 오늘
쏟아지는 비를 보며 생각한다

왜 하필 그날 절룩거리는 운명이
송곳니처럼
내 목을 죄어왔는지

취중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눈 끝이 뜨거워지는 나는
이생에서 또 이렇게 상스럽다

체머리 흔드는 벌을 받으며
왜 또
술잔을 받아 드는지
두 시간째 빗줄기를 바라보며
자꾸만 생각한다
운명이 어느 순간을 만들었고
그 순간들이 내 오랜 뒷모습이 됐음을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슬픈 버릇 - 허연


가끔씩 그리워 심장에 손을 얹으면 그 심장은 이미 없지.
이제 다른 심장으로 살아야 하지.

이제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면
공기도 우리를 나누었지.
시간이 날린 화살이 멈추고 비로소
기억이 하나씩 둘씩 석관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뚜껑이 닫히고 일련번호가 주어지고
제단 위로 올라가 이별이 됐지.

그 골목에 남겼던 그림자들도,
틀리게 부르던 노래도,
벽에 그었던 빗금과,
모두에게 바쳤던 기도와
화장장의 연기와 깜빡이던 가로등도 안녕히.

보랏빛 꽃들이 깨어진 보도블록 사이로 고개를 내밀 때,
쌓일 새도 없이 날아가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이름이 지워진 배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에서
명치 부근이 이상하게 아팠던 날 예감했던 일들,
당신은 왜 물 위를 걸어갔나요.

당신이라는 사람이 어디에든 있는 그 풍경에서
도망치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옥입니다.



 

#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석사, 추계예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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