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름, 희다 - 강문숙

마루안 2022. 7. 9. 21:25

 

 

여름, 희다 - 강문숙

 

 

여름에 내리는 비는 희다, 아프다

발등 찍힌 채 칭칭, 하얀 붕대를 감고 절룩이며 걷다가

홀연히 돌아보면 온통 진창이다

 

몇 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이들이 사라졌다

다시 기억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단애의 시간들

흰 그늘의 슬픔이 짙어진 오후 세 시쯤

쏟아지는 눈물 속으로 내 뼈는 하얗게 부서지고

 

하늘은 한쪽으로 희뿌연 빗살을 뿌리며 기울어질 듯하다가

우레를 숨긴 채, 곧 제자리에서 눈꺼풀만 겨우 닫는다

 

누군가 입을 열어 말을 붙인다면 줄줄 흰색으로 흘러나와

순식간에 나를 에워쌀 것 같은 저 빗줄기의 감옥

나는 기꺼이 최선을 다해 미쳐 갈 것이다

 

그 흰빛에 갇혀 종일 반복 재생하는 음악처럼

칠월 장맛비는 마디가 없다, 길다

 

 

*시집/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천년의시작

 

 

 

 

 

 

꽃의 슬하 - 강문숙

 

 

오롯한 날들 홀로 정 없이 흘러갔다고 말하진 않겠다

내 곁을 떠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다는 아니었을 터

 

웬만해선 곁은 내주지 않는 외골수의 제 천성도 없지 않았으니

누구 탓이라는 말도 오늘은 않겠다

 

마음에 얹혔던 몸 기어이 아파 한참을 집 비운 사이

탁자 위 난 꽃대의 슬하에 맑은 이슬 맺혔다

 

지문 닳은 내 손가락은 너무 뭉툭해

오랫동안 입속에서 고요하던 혀끝을 내밀어 대어 본다

 

아 무미한 저항의 이 맛, 꽃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기에

너는 너무 힘든 길을 홀로 걸어왔구나

 

갸륵한 이마를 가진 것들의 안간힘이 찌르르, 혀끝을 잘라 먹는다

서둘러 날 저물고 무너지는 것들이 입속으로 다 들어온다

 

사람이여, 네가 가는 길 위에 웬 모래가 이리 많은가*

 

 

*강은교의 시 <황혼곡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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