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통속한 여름 - 강시현

마루안 2022. 7. 10. 19:43

 

 

통속한 여름 - 강시현

 

 

여름이란 세상에 널리 통하는 풍속이나 습속이어서 아름답다

 

햇살의 커튼이 처마를 걷어 올리는 만삭의 아스팔트 내음,

도시의 과육은

통속종합병원의 정성 어린 진단과 처방에도 물먹은 자두처럼 짓물러 갔다

도시의 처진 눈은

어디쯤에서 만난 통속을 끌어안고 한눈을 팔기도 했고

 

박꽃에 달빛 쏟아져

자작나무가 하얗게 취한 길을 끌고 오던 밤,

쓰린 공복(空腹)의 숲을 걸을 때

여름은, 햇살을 삼킨 거대한 입으로 연신 하품을 뱉고

 

통속의 단단한 경계 안에서는

살은 뼈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욱신거리는 빌라촌 불빛에 발이 걸린 별의 군락지가 기우뚱하는데

그 틈으로 여름의 치마 속을 힘끔거리는 축축한 눈초리들

널리 통하는 습속은 그런 것인가

 

털어놓자면, 통속을 처음 만난 것은

시외버스 차창에서 킬킬거리던 선데이 서울에서였을 것이다

 

 

*시집/ 대서 즈음/ 천년의시작

 

 

 

 

 

 

여름 자전거 - 강시현

 

 

땅 위의 모든 숫자는 지워지고

어떤 색채도 사라진 뒤에야

네 뜸한 소식은 허공을 떠다니던

아찔한 높이의 안장에 앉아 있다

 

찔레 가시 같은 목마름 한 다발 싣고

북쪽 너른 바다로 가는 느린 기차

역전 시계가 조는 사이 그을린 얼굴로 정거하면

두근대는 바퀴마다 현기증처럼 무성한 물이랑이 일고

내 작은 자전거는 밀짚모자를 쓰고 더운 바람을 들이켠다

 

유리 지갑처럼

내장이 벗겨진 채

종점으로 힘겹게 끌고 가는 프리덤의 낮과 밤

여름 자전거가 암호의 세상을 굴리며 간다

 

젊은 날은

금방 스러지고 마는 실바람같이

감시탑의 탐조등에 잘못 걸려든 암실의 빛과 같이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

이번 생은 다 지나간 것일까

흰 목덜미를 감고 빛나던 여름의 바퀴가

바람 먼지에 그만, 뚝, 제 다리를 부러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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