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행병 같은 것들 - 강민영

마루안 2020. 10. 17. 21:39

 

 

유행병 같은 것들 - 강민영


머리통을 흔드는 매미 울음보다 더한 갈망은
빈 껍질이 되기까지
밤에도 신열처럼 떠오른다

밤을 새우며
커튼만큼 주름지던 그녀는
얼굴에 꽃 하나를 얹기로 했다
압구정동에서 바느질이 제일 좋다는 남자는
얼굴에 함부로 선을 긋는다
어느 꽃으로 할까요
그녀는 난이도가 가장 높은
호접난을 가리켰다

뽕브라를 한 여자가
대기실에 앉아
풍성한 열매를 고른다

열매를 버린 은행나무는
바람에 말라가고
젖줄을 놓친 은행이
퀴퀴한 비명으로 땅을 뒹군다

가볍게 날리는 몸통들
소문은 압구정동을 돌며 진화하고
향 없는 난들이 위태롭게 태어나고
더러는 소멸한다

유튜브에서 의사가 예언한다
향후 10년이 지나면 이 거리엔
판박이 괴물들이 떠돌게 될 겁니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하늘이 얼고 녹고, 또 꽃이 피지 않아도 - 강민영


희경이가 교실에서 돈을 잃어버렸다
37명의 피의자들은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손을 든 사람이 없었으므로 번호대로 한 명씩 교무실에서 취조받았다 여관집 무남독녀 희경이가 돈을 잃어버린 곳이 교실인지 문방구인지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우리의 불안은 배 속에서 쿵쾅거렸고 우리가 짝을 의심하는 동안 점심시간이 끝나갔다
선생님의 직감은 늘 코찔찔이, 할머니와 둘이서만 살고 있는, 옥수수빵 급식을 받아갔던, 때가 탄 옷소매가 반들거리던 순정이었다 토막 난 지우개도 임자를 찾아주던 눈 밝은 순정이는 빨간 귓불을 하고 가방을 쌌다 선생님이 희경이에게 반장을 시키듯 순정이에게는 도둑을 시켰다 그 애는 얼룩진 얼굴로 화단의 꽃들을 잡아 뜯으며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운동장 흙을 차대며 먼지 속으로 걸어가고 누명을 벗은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창가에 붙어서 키득거리고 더러는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침묵이 폭력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수십 번은 하늘이 얼고 녹았다 또, 꽃이 피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생겼지만 우리의 침묵은 외침으로 자라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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