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삶의 동질성에 대하여 - 정충화

마루안 2020. 10. 18. 19:35

 

 

삶의 동질성에 대하여 - 정충화

 

 

남산 어린이회관 근처에 사는 비둘기들은

부잣집 도련님 때깔이 난다

알록달록 치장된 공동주택 테라스에

위엄 있게 앉아

아이들 손에 들린

과자 조각을 지그시 탐하는

여유로움이 있다

 

 

우정국로 길바닥을 배회하는

바둘기들은

땟국이 줄줄 흐르는

구걸하는 아이 행색이다

행인들의 발길을 피해 가며

아스팔트의 모래를 쪼아대거나

쓰레기 봉지를 헤집는

생의 고단함이 찌들어 있다

 

사람 곁에 살다보니

저들에게도 부유층이 있고

하층민이 있다

 

 

*시집/ 봄 봐라, 봄/ 달아실

 

 

 

 

 

 

지하 여인숙 - 정충화

 

 

서울역 지하도는

해질 무렵 빗장을 풀고

여인숙이 된다

거리에 어둠이 들면

길바닥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제 몸 누일 만큼의 쪽방을 얻어 하룻밤을 난다

별빛 한 올 스미지 않는 냉골 바닥

그들 사이에 세워지는

보이지 않는 벽들

행인들의 발소리에 엮인 이불이

그들의 가벼운 잠을 덮어준다

 

짧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듯

다가든 아침

여인숙은

지상으로 투숙객을 내쫓고

다시 지하도로 용도변경을 한다

 

통로 바닥에

쫓겨난 자들이 꾸다가 만 꿈들이

껌처럼 납작 눌러붙어 있다

 

 

 

 

# 정충화 시인은 1959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2008년 계간 <작가들>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누군가의 배후>, <봄 봐라, 봄>이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약용식물과에서 기술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