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69

요절 시인, 트루베르 피티컬을 추억함

요즘 한 시집을 뚫어져라 읽고 있다. 고태관의 시집 이다. 그의 유고 시집이다. 보라색 표지에 쌓인 시들이 처연하다.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유고 시집이란 선입견을 지우고도 이런 느낌이 들 것이다. 이 시집이 나오기 전까지 피티컬이란 존재를 몰랐다. 알았다 해도 큰 관심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시를 노래하는 랩퍼였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고태관에 관한 기사를 찾다 동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그 영상을 보고 그가 어렸을 때부터 시인이 꿈이었다는 걸 알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고 20년 동안 신춘문예를 투고했다. 번번히 낙선을 하면서도 매년 12월이 되면 신춘문예 투고병이 도졌다. 학교 친구들은 이미 등단을 한 시인이 많았다. 예전 신림동 고시촌에서 매년 낙방을 하면서 늙어 가는 고시 낭인이 생각..

여덟 通 2021.06.19

살만 투어 그림들, Salman Toor Paintings

The Singers, 2019. Oil on canvas, 35 x 33 inches 코로나 때문에 여행이나 항공 업계가 직격탄을 맞았다. 그에 못지 않게 공연이나 미술계 업종의 타격이 크다. 나부터 여행은커녕 극장이나 전시장 나들이 끊은 지가 오래다. 방역 수칙의 제1 철칙은 가능한 사람 몰리는 곳은 피하고 볼 일이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확진자가 쏟아져 나오던 작년(2020) 가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

여덟 通 2021.06.15

항소이유서 - 유시민

#유시민이 26세 때 암기해 일필휘지로 썼다는 항소이유서 전문이다. 법률 용어가 친숙하지 않는 것처럼 이 글도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딱딱한 문장이다. 특히 내가 경어체 문장에 적응을 못 하는데 이 글은 술술 읽힌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재주다. 유시민은 천상 작가다. 항소이유서 - 유시민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

여덟 通 2021.04.20

창작과 비평 2021년 봄호에서 만난 시

난데없는 코로나 때문에 봄을 잃어버린 작년에 이어 2021년에도 제대로 된 봄을 맞긴 힘들 듯하다. 어쨌거나 징글징글한 코로나 시국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온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작년까지만 해도 이리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백신이 나오더라도 당분간 마스크에서 완전 해방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여행지로 떠날 버스나 비행기를 기다리며 붐비는 대합실에 앉아 있던 시절이 그립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공연장에서 연극을 봤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어쩌다가 최대한 얼굴을 가리는 것, 가능한 사람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되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뀐 일상에서도 세월은 흘렀다. 다른 해보다 다소 일찍 온 봄소식과 함..

여덟 通 2021.03.15

시사사 2020년 겨울호에서 만난 시

가 의 약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시판에서 상부상조하는 시인들 빼고는 아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사사가 변화를 했다. 가격도 파격적으로 내리고 시전문 계간지로 재탄생했다. 여전히 독자보다 시인들끼리 소통하는 내수용 잡지에 그치고 있지만 시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시사사의 목적처럼 독자의 사랑을 받을 날이 왔으면 좋겠다. 시사사 겨울호에 유독 눈길을 끄는 시가 보인다. 전영관 시인의 신작시다. 이 시가 나중 시집에 담겨 나올 때 성형수술을 하고 올지는 모르겠으나 눈과 입에 착 달라 붙는 시가 긴 울림을 준다. 책이든 잡지든 손에서 한번 멀어지면 다시 잡기 힘들다. 잊어버리기 전에 올린다. 원룸 - 전영관 소외가 지속되면 구면이 버겁다 익명이 편해지는 것이다 하늘만 비추고 표정..

여덟 通 2021.01.08

노무현 대통령 추모 전시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펑펑 울었다. 믿기지 않아서 울었고 기가 막혀서 울었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보수 권력과 그들의 주구인 검찰이 미워 울었다. 내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잠깐 운 것 빼고는 누군가의 죽음에 울기는 처음이었다. 긴급 서거 뉴스를 들으면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때 노무현 대통령은 내 가슴에 담은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단 한 사람만을 가슴에 담고 살려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나오면서 두 사람이 되었다. 어느 정도 슬픔에 단련이 된 후 봉하 마을을 여러 번 갔다. 처음 갔을 때 울지 않으려 했는데 당신 이름을 새긴 묘석을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특별한 날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사람 많지 않은 날을 골라 조용히 다녀온다. 이제는 봉하 마을에 가도 울지 않는..

여덟 通 2020.05.22

창극 - 패왕별희

지난 봄 국립극장에서 놓친 공연이다. 봄이면 들로 산으로 바람 난 숫캐마냥 돌아댕기느라 이 좋은 공연을 보지 못했다. 재공연을 해서 용케 볼 수 있었다. 예술의전당도 간만에 가니 좋았다. 천상 이런 곳은 공연 있을 때나 갈 수 있는 장소다. 남산 자락에 숨어 있는 국립극장 또한 마찬가지다. 패왕별희는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로 유명하다. 나 또한 그 영화를 보고 장국영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를 정도로 장국영의 연기는 소름이 돋았다. 내용은 잘 알려진 대로 패왕 항우와 그의 연인 우희의 비극적 이별이다. 어릴 적에 나는 지독한 개구쟁이였다. 어머니가 심부름이나 뭐를 시키면 예보다는 싫어 아니면 안해였다. 그때 어머니가 했던 말이 있다. 저 놈의 새끼는 항우 장사도 못 해봐..

여덟 通 2019.11.11

순수의 시대 - 문진우 사진전

북촌에 괜찮은 사진 갤러리가 하나 있다. 작년에 개관했는데 실험적인 사진가들을 많이 소개했다. 전통 방식의 흑백사진을 좋아하기에 몇 번 갔다가 금방 시들해졌다. 전시를 볼 목적이 아닌 그냥 북촌을 산책 삼아 걷다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정도였다. 이번 전시는 내 마음을 제대로 잡아 흔들었다. 내가 추종하는 최민식 사진을 본 듯 오래된 풍경이 화석처럼 박혀 있는 오리지널 흑백이 반가웠다. 게으른 사람이라 전시 후기도 가물에 콩나듯 올리나 이번 전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사진가 문진우는 1959년 생으로 주로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의 사진집 를 보고 작가를 알았다. 나름 부지런히 사진 전시를 보러 다녔지만 이 사람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긴 서울보다 주로 부산에서 전시를 해서 그럴 것이다. 문..

여덟 通 2019.09.16

삶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 천양희

#처서가 가까워 오면 여름 동안 움츠렸던 마음을 정리하고 슬슬 여행 채비를 한다. 설날과 추석 연휴, 연말연시, 그리고 매년 7월 하순에서 8월 중순까지는 여행 갈 생각을 아예 접고 바짝 엎드려 서울에만 갇혀 지낸다. 가능한 남 하는 것 따라 하지 않으려는 심사 때문이다. 매달은 아니어도 일 년에 두 번 정도 가지 않으면 그리움에 좀이 쑤시는 도시가 있다. 춘천과 부산이다. 맹목적이지만 나는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특별한 여행 계획도 없이 일단 부산행 기차를 탔다. 계획이 없어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없어 못 보는 게 부산이다. 숙소인 영도에서부터 슬슬 걸어 보수동 헌책방 골목까지 왔다. 책을 사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보수동이라고 그대로일까..

여덟 通 2019.08.31

우리 강산을 그리다 - 조선 실경산수화 전시회

모두들 산으로 바다로 휴가를 떠난 서울 거리가 한산하다. 해마다 이런 한적함을 즐기기 위해 남들 떠날 때 일부러 남는다. 잠시라도 사람 부대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은 딱 2주 정도다. 간다 간다 하면서 미루던 전시장을 찾았다. 국립박물관으로 피서를 온 셈이다. 실경산수화, 교과서에서 배우던 용어다. 실제 산을 보고 그린 사실적인 그림이라는 말이겠다. 그래도 내 눈에는 많은 그림이 비현실적이다. 아니 초현실적이다. 이런 그림 앞에 서면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늘 봤던 그림이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학교에서는 피카소나 고흐 그림을 먼저 배웠다. 우리 그림은 있어 봤자 몇 꼭지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선지 몰라도 나는 우리 그림보다 서양 그림이 더 좋다. 인상파 작가들 많이 좋아한다. 특히 뭉크와 ..

여덟 通 2019.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