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69

모든 의자는 평등하다 - 소동호 사진전

그냥 지나칠 뻔한 전시회를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전시회도 만날 인연이면 볼 기회가 주어지는가 보다. 이 전시가 그렇다. 인사동 전시장 몇 군데를 돌면 보통 종로 쪽으로 향한다. 오늘 점심을 먹기 위해 헌법재판소 쪽으로 이동하다 이 전시를 만났다. 만났다기보다 전시 포스터가 안내를 했다는 게 맞겠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갔다가 홀딱 빠졌다. 소동호 작가는 지난 5년간 오직 의자만을 찍었다. 서울 길거리 의자 프로젝트다. 이 작가가 마음에 든 것은 그가 찍은 의자가 한결같이 낡고 초라하다는 거다. 전시장에 걸린 사진 숫자는 거의 400여 장에 가깝다. 전시 공간의 한계인지는 몰라도 옆서 크기의 사진을 촘촘하게 배치를 했다. 오래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내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세상을 나왔는지는..

여덟 通 2022.07.16

시적 소장품 전시회

시적 소장품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된 전시회다. 특별한 목적 없이 전시장 나들이는 이렇게 이색적인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된다. 시립미술관은 상설전이 열리는 터라 무작정 들러도 헛걸음 할 일은 없다. 1층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창밖의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맛도 괜찮다. 신기한 건 계절마다 사람들 옷차림 달리지는 것뿐 아니라 걸음걸이도 바뀐다는 것이다. 시적 소장품전은 단체전이다. 시와 미술이 다른 예술 장르지만 상호 보완적인 예술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고매한 감상평을 남길 것까지야 있겠는가. 골목길에 늘어선 화분들 꽃 구경하듯 전시장 천천히 돌고 나서 머리가 개운해지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여덟 通 2022.04.23

노실의 천사 - 권진규 탄생 100주년 전시회

시립미술관에서 권진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제목인 가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전시회 설명을 찾아 보니 노실의 천사는 1972년 3월 3일 조선일보 연재 기사에 실린 권진규의 시, 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그의 삶과 예술을 담은 이 시에서 노실의 천사는 가마 또는 가마가 있는 방으로 아틀리에의 천사, 즉 그가 작업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순수한 정신적 실체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을 읽고 제대로 이해를 했다. 이번 전시는 권진규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다. 언제 이렇게 방대한 권진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가. 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것 때문에 그동안 나는 불운의 조각가로만 알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권진규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이해함과 동시에 그의 삶도 알게 되었다. 전시장 곳곳에 작..

여덟 通 2022.04.23

내 작은 방 - 박노해 사진전

박노해 시인이 사진 에세이집 을 내면서 소박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문화계에서 그리 큰 관심을 받고 있진 않지만 박노해의 사진 에세이 시리즈는 계속 나오고 있다. 그가 시인으로 비주류였듯이 사진으로도 박노해는 비주류다. 천성이 비주류인 나는 이런 박노해가 좋다. 한때 노동자 시인으로 추앙 받았으나 목소리에 힘을 빼면서 시인은 더욱 비주류의 삶을 살고 있다. 사진집치고는 아주 작다. 작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엽서 크기 정도의 책이다. 책에 실린 사진 중에서 고른 작품이 이번 전시장에 걸렸다. 카페 2층에 있는 전시장도 아담하다. 사진은 감동적이다. 전부 흑백으로 찍었다. 인간에게 방은 태어남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 엄마의 자궁이 방이고 자기 방을 갖기 위해 평생을 바쳐 아파트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여덟 通 2022.04.18

실천문학 2022년 봄호에서 만난 시

천변 풍경 - 이진명 계절 바뀌도록 걸음 뜸했던 이웃 천변에 천변 풍경이 생겼다 왜 아닐까 당연히 천변이니 천변 풍경은 생겨나는 것 물을 것 없이 죽순처럼 커피 커피 커피 세상 동네마다 카페가 돋는 시절 웃었다 옛날 감성 복고풍 찐 냄새 대놓고 피운 지난 연대의 이름표 나무판에 한자로 새겨 단 川邊風景 버스 다니는 큰길에서는 천변 풍경 보이지 않는다 버스 다니지 않는 작은 다리 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리 아래로 예닐곱 돌계단 내려서야 만난다 천변 풍경 테크에서 커피를 앞에 놓고 앉았다 앉아 봤다 그래 봤다 커피를 넘겼다 계절은 또 곧 바뀔 것이다 시선을 멍히 던졌는데 한판 투명한 커다란 거울처럼 물 얼굴이 돈다 북으로 멀리 북한산 이마가 마주쳐 오고 남으로는 멀지 않게 미아리 고개가 오래 있다 동으로는..

여덟 通 2022.03.24

대산문화 2022년 봄호, 발견 시

희망을 내포하고 막바지로 치닫는 중일까. 코로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중에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꽃이 피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남쪽에는 매화가 피기 시작한 모양이다. 대산문화 봄호에서 눈에 띄는 시를 발견한다. 좋은 시는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눈과 가슴에 스며들기 마련이다. 이런 걸 공감이라고 하던가. 잊힐세라 필사를 시도한다. 한 자씩 누를 때마다 이 시가 더욱 가슴에 박힌다. 행간은 물론이고 助詞 하나까지 버릴 게 없다. 여운이 오래 남는 시다. 탑신에 내리는 눈 - 기혁 촛불이 내부의 어둠을 태워 불을 밝힌다고 속단했으나 나의 무게는 이내 돌멩이의 내면에 부딪치고 말았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던 인연들이 단 한 번 발길질로 무너져 내릴 때 그것은 스스로 열린 적 없는 암석의 외부가 아니라 수천 년 풍화로..

여덟 通 2022.03.14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 사울 레이터 사진전

내가 좋아하는 사울 레이터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서울에 좋은 전시장이 많이 있지만 남대문 시장 건너편 남산 아래 있는 피크닉 만한 공간이 있을까. 아주 오래된 동네였는데 이런 좋은 전시 공간이 생겼다. 남산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 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스마트폰 시대에 이렇게 옛날 냄새가 나는 동네도 드물다. 올초부터 가야지 했다가 오늘에야 갈 수 있었다. 오전에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를 마치고 바로 전시장으로 갔다. 직원들도 친절하고 방역에 철저했다. 무한정 표를 팔지 않고 매 시간 한정된 관객만 받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예매할려고 하면 늘 매진이었는데 오늘 표도 3주 전에 겨우 예매한 것이다. 사설 전시장에서 이런 행정 쉽지 않다. 더구나 이 전시는 얼마나 인기가 많은가. 입구에..

여덟 通 2022.03.05

空의 풍경 - 임연웅 개인전

포스터에서부터 눈을 붙잡는 전시회가 있다. 임연웅 사진전이 그랬다. 포스터에 있는 사진 한 점만 보고 와도 마음이 풍족해진다. 포스터에 나온 사진답게 전시장 맨 앞에 걸렸다. 멀리 황룡사지가 보이는 길이다. 오래 서서 들여다 봤다. 인사동 갤러리 이즈는 독특한 외관에다 감상하기 좋은 전시장이다. 인사동이든 청담동이든 생겼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거나 있었다가 없어진 화랑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인사동만 봐도 10년 넘게 같은 자리에 있는 화랑이 몇 개나 될까. 아마도 사설 전시장으로 접근성으로나 전시장 동선으로나 이 정도 갤러리 드물다. 발길을 붙잡는 전시가 있을 때 코로나 시국에도 종종 들르는 곳이다. iS 갤러리는 문익점의 후손이 세운 문중문고인 라는 영문 앞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임연웅의 전시는 전국..

여덟 通 2022.02.26

월간 현대시 2월호, 발견 시

#김춘수 선생의 그 유명한 시 의 첫 문장은 이렇다. . 맞다. 구구절절 맞다. 이번 달 현대시에 나온 시 중에서 김승희 시인의 시가 그랬다. 아무리 좋은 시를 발표해도 독자가 읽어 주지 않는 시는 의미가 없다. 친분 있는 시인들끼리야 서로 읽어 주고 빨아 주며 품앗이를 하니 넘어 가자. 생각보다 시인들이 남의 시를 잘 읽지 않는다. 그저 글거리 소재로 활용할 때뿐 자기 시에 취해 사는 사람들이다. 시 읽는 사람보다 시 쓰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서 써서 즐겁고 읽어서 괴로운 시 또한 얼마나 많던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에겐 관심 없고 오직 자기 차례에 부를 노래 찾는 것에 정신을 쏟는 것과 다름 없다. 이번 호에서 공감 가는 시 한 편 만나지 못하고 그냥 넘어 가나 했는데 김승희 선생의 시가 있..

여덟 通 2022.02.21

박수근 전시회 - 봄을 기다리는 나목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박수근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금까지 몇 번 박수근 작품전을 봤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전시는 처음이다.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시적인 제목도 마음에 와 닿는다. 이번 전시회 제목처럼 박수근 하면 박완서 선생과 뗄 수가 없다. 전시장 곳곳에 박완서 선생의 흔적이 보이고 선생이 쓴 책도 함께 볼 수 있다. 네 개의 전시장을 돌고 나면 박수근 화백 인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박수근 화백은 밀레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가난한 형편에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다. 당시 미술계는 일본에서 공부한 유학파가 주류였다. 박수근은 정식 학교도 나오지 않고 근본 없는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다. 그의 그림을 알아 본 외국인들..

여덟 通 2022.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