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녹 RUST - 조나단 월드먼

나는 이런 책이 참 흥미롭다. 처세술과도 관계 없고, 그렇다고 빼어난 문장력으로 문학적 완성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에서 무심하게 넘길 수 있는 것을 깊이 있게 파헤친 내용이다. 저자는 어쩌다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녹(綠)의 사전적 풀이는 이다. 신기하게도 녹의 한자는 녹색과 동일하다. 흔히 녹색은 유월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는 우거진 숲의 녹음을 떠올리게 되나 쇠붙이의 녹은 그 색깔이 아니다. 어떻게 綠이라는 뜻이 이렇게 대비가 되는 곳에 같은 글자로 표기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혹여 청동 기와에 낀 파란 녹을 표기해서 그랬을까.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에도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이 나오기는 한다. 옛날의 파란 녹은 금속의 발달과 함께 현재의 고동색 비슷한 색으로 변했다. 현대인의..

네줄 冊 2018.01.16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 - 한창훈

간만에 꾸밈없이 날것으로 감동을 준 산문을 읽었다. 흔히들 산문 하면 온갖 미사여구 섞어서 자신의 삶을 꾸미기 바쁜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시를 좋아해서 특히 시인들의 산문을 자주 읽는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틈틈히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산문집은 울림이 없는 글이다. 그런 산문으로 독자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면 구멍가게 아저씨가 속임수로 동네 아이들 코묻은 돈을 후리는 것과 진배 없다. 좀 이름 있다는 시인들이 출판사와 쿵짝을 맞춰 산문집을 쏟아낸다. 호갱이 휴대폰 가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창한 제목을 달았으나 감동이 없는 글은 공허하다. 그러고도 시인이란다. 안 팔리더라도 그냥 시나 쓰시지, 그러면 적어도 쪽은 안 팔리지 않겠는가. 시가 안 읽히는 것도 글은 못 쓰면서..

네줄 冊 2018.01.15

우리의 월급은 정의로운가 - 홍사훈

KBS 홍사훈 기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책 제목을 기가 막히게 지어서 내 눈에 띄었다고 할까. 모든 근로자들에게 월급이라는 단어는 목숨줄과도 같은 것이다. 내게도 월급은 목숨줄이다. 언젠가부터 MBC와 KBS를 보지 않았다. 얼마 전에 MBC가 최승호 사장이 들어오면서 조금씩 바뀌고는 있지만 예전의 신뢰감을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반면 KBS는 아직 멀었다. 나는 몇년 전부터 JTBC를 가장 신뢰한다. 뜬금없는 방송사 얘기하다 책 이야기로 돌아간다. 내가 10년 가까이 멀리했던 KBS에 이런 기자가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고 고맙다. 책을 읽고 나서 내용이 너무 좋아서 뒤늦게 그가 만든 시사 프로를 봤다. 개나 소나 기자 하는 요즘에 이렇게 보석처럼 빛나는 기자가 있다. 요즘 한심스런 기..

네줄 冊 2018.01.11

노동여지도 - 박점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빌린 제목이 독특하다. 노동여지도는 조선후기 김정호가 조선팔도 곳곳을 걷고 산을 오르면서 기록한 지도처럼 노동운동가 박점규가 남한 곳곳을 찾아 다니며 현재의 노동현실을 지도로 완성했다. 노동현장 답사기라 해도 되겠다. 그만큼 값진 책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 하면서도 육체적인 노동은 여전히 천시를 받고 있다. 거기다가 노동 현장도 사무직보다 기술직이 훨씬 열악하면서 임금도 저렴하다.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어떤가. 이 책은 그런 현실의 꼼꼼한 보고서다. 삼성의 도시 수원에서 시작한 여정은 전국 곳곳 노동 현장을 돌아 출판 도시 파주까지 이어진다. 스물 여덟 곳의 노동 지도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도시 전체가 대기업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는 곳도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협..

네줄 冊 2018.01.08

눈물에 금이 갔다 - 김이하 시집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시집이 오래오래 내 마음을 사로 잡고 있다. 딱 무슨 책을 구입해야지 하는 생각이 아닌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헌책방을 들른다. 사람도 그렇지만 책에도 인연이란 것이 있어 만날 책이면 언젠가는 만나고 못 만날 책은 평생 가도 엇갈리기만 할 뿐이다. 내 발로 들어간 책방이건만 마치 이 시집이 오랫동안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싶다. 이 시집 표지처럼 보라색을 보면 슬프다. 고귀함이나 귀족을 상징하는 색이면서 선뜻 선택하기 망설여지는 우울한 색이 보랏빛이다. 이것은 학자들이 정한 미학이나 심리학으로 접근한 이론이 아니라 그저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생각일 뿐이다. 어쨌든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한 무명 시인을 알게 되었다. 디자인도 시집 구성도 단촐하나 맑고 ..

네줄 冊 2018.01.07

개념의료 - 박재영

이 책의 부제는 다. 병원은 가능한 안 가면 좋겠으나 살면서 어디 그게 쉬운가. 가기 싫은 곳이면서 병원에 대한 기대가 크다. 내 병을 낫게 해줄 거라는 의사에 대한 믿음, 그리고 정확하게 진단해서 적절한 치료를 기대한다. 병원이나 질병에 관한 책이라면 딱딱하고 재미 없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이 책은 아주 흥미롭게 술술 읽힌다. 이유는 평소에 경험한 의료계에 관한 부조리와 문제점을 쏙쏙 꼬집어 내어 설명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리적인 글솜씨도 한몫 한다. 글이란 쉬워야 한다. 설명을 하는 책일수록 교양있는 척 경어체를 써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데 이 책은 머리에 속속 들어오고 믿음이 간다. 현장에서 경험한 것과 오랜 관심에서 우러난 결과일 것이다. 예전에는 몸이 아파야 찾던 병원이지만 요즘엔 건강 검진..

네줄 冊 2017.12.28

볼 수 없었기에 떠났다 - 정윤수

밑도 끝도 없이 나와 닮은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이 책은 제목도 내용도 딱 내 이야기다. 오래 전 가랑잎처럼 홀로 떠돌 때 고독은 나의 친구였다. 지금도 여전히 외로움을 비타민처럼 여기며 살지만 여행길의 고독은 얼마나 황홀했던가. 이 책은 정윤수가 홀로 떠난 발자국을 따라간 흔적이다. 여행 안내서는 아니고 여행 인문학이라 해야 맞겠다. 홀로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 대한 당당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 여행길은 대부분 예전에 내가 갔던 길이다. 시대와 함께 도로는 포장되고 풍경은 바꼈으나 인문학적 풍경은 오롯이 책에 담겼다. 새것이 좋은 것인 시대이기에 조금만 낡으면 부수고 새것이 들어선다. 정윤수의 여행길도 이런 곳이 대부분이다. 19살에 청춘의 무게를 자전거에 싣고 전국을 여행했던 청년은..

네줄 冊 2017.12.26

퇴적 공간 - 오근재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늙는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 언젠가부터 나는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다. 후레 자식! 너는 안 늙을 줄 아느냐고 힐난할지 모르나 내 마음에서 노인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도 일종의 차별이다. 나이 먹은 사람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한다. 주변에서 매사에 목소리부터 높이는 진상 노인을 목격하는 일이 너무 흔하다. 연륜이 쌓일수록 너그러워진다는데 그 반대로 포용심은 늘지 않고 심술만 늘었다. 젊을 적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넥타이를 매던 직장인들이 예비군복 하나로 행동이 바뀌는 걸 봤다. 아무 곳에나 소변을 보고 조교의 교육 지침에 딴지를 걸기도 한다. 구별되지 않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벼슬..

네줄 冊 2017.12.23

죽음 연습 - 이경신

모처럼 좋은 책 하나를 읽었다. 기대를 갖고 읽었어도 별로 감동이 없는 책들이 많은 세상에서 강력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특히 마흔 이후의 중년들은 깊이 공감할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다 안다. 그럼에도 죽음은 누구나 피하고 싶다. 이라는 어두운(?) 제목과는 달리 죽음에 대한 깊이 있고 논리적인 글이 술술 읽힌다. 철학자의 글이 대부분 어려운데 이 책은 쉽다. 많이 배워 책 쓰는 자들의 특징이기도 한 저자의 입장이 아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썼기 때문일 것이다. 잘 늙고 잘 죽는 것을 넘어 잘 사는 것에 대한 사색이라는 부제처럼 이 책을 읽고 나면 잘 살고 싶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 된다. 왜 모든 것이 말은 쉬운데 행동은 어려운 것일까. 잘 죽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도 실천이 그만큼 ..

네줄 冊 2017.12.22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 임영태

언젠가부터 소설은 잘 안 읽는다. 읽어도 별로 감동이 없고 시시하게 느껴진다. 어쩔 땐 내가 살아온 날들이 소설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임영태의 소설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도 참 시적이다. 그이 초기작인 를 읽었던 시절이 아득하다. 왜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쓸쓸함과 함께 모든 삶들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걸까. 읽으면서 줄곳 작가 이야기이자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큰 욕심 없이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잔잔한 일상이 내 일기장을 읽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김훈의 소설처럼 빼어난 문장이 있는 것은 아니나 목덜미가 서늘한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지인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옛 추억을 떠올리는 대목이다. . 예전처럼 그의 소설은 여전히 쓸쓸하다.

네줄 冊 2017.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