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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극장 - 이현승

일인칭 극장 - 이현승 마음이 하는 짓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였지만 또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였으므로 어쩐지 위대함으로 압도하는 당신 앞에서 존경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을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해도 될까. 마음은, 왜 그러는가 꼭대기 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응시하면서 그런다고 더 빨리 내려오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더 힘껏 더 자주 호출 버튼을 누르고 멀리 보면 모두들 제각기 갈 길을 갈 뿐인데 누군가가 자꾸 내 인생으로 끼어든다고 생각하며 어쩌다 내가 가서 한잔하면 그 술집에 손님이 붐빈다거나 심지어는 내가 응원하는 팀과 선수는 내가 안 봐야 이긴다거나 변덕이죽 끓듯 한 이 마음 밖으로 나가는 길은 없는가. 마음은 유령거미처럼 종종 여기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가 없..

한줄 詩 2022.05.31

구름이 낮아 보이는 까닭 - 박용하

구름이 낮아 보이는 까닭 - 박용하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계산이 묻어 나온다 반갑기보다 저의가 묻어 나온다 내심 잘도 잊지 않았구나 싶은데 낯 뜨거운 목적이 속 뜨겁게 올라온다 때론 뻔뻔하고 뻔하기도 하더구나 네가 아직 죽지도 않았더구나 궁금하기도 해서 난 하나도 궁금하지 않는데 넌 먼 강산과 오늘 날씨를 말하더구나 나의 형제들과 출신 성분을 끌어들이더구나 나의 흐린 문장을 말하더구나 뜻밖에 오는 전화 속에는 뜻밖의 일이 없다 쓸개 빠진 덕담과 공허한 잡담 부탁 아니면 둘도 없는 네 외로움 전화를 기다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얄팍한 산술이 기어 나오더구나 네가 아직도 글을 쓰더구나 나는 내가 쓴 글에 관심 없는데 넌 먼 평판과 오늘 인심을 말하더구나 나의 벌거숭이 문장을 말하..

한줄 詩 2022.05.29

조난신호 - 전대호

조난신호 - 전대호 말 없는 바닥아, 목숨 붙은 이래 줄곧 허공에 매달려 있었기에 우리 서로 닿은 적 없구나. 필시 귀도 없을 네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했구나. 암벽에 달라붙은 그가 문득 이동을 멈추고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동작을 시작했을 때, 홀드를 왼손과 오른손으로 번갈아 쥐며 자유로운 팔로 새의 날갯짓을 흉내 내기 시작했을 때, 무릇 목숨 붙은 놈이 보내는 신호는 다 조난신호다. 그가 조난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곧 간다고, 철퍼덕 들이닥쳐 속을 다 쏟아놓겠다고, 바닥에게 기별하고 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뭐 대수로울 것도 없는 것이, 어차피 말 없는 바닥을 향한 조난신호였으므로. *시집/ 지천명의 시간/ 글방과책방 닻과 연 - 전대호 내가 내린 닻 바닥에 닿지 않았지. 애당초 기대하지 않..

한줄 詩 2022.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