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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견딜 고통은 없어 - 박노해

못 견딜 고통은 없어 - 박노해 젊어서 못 견딜 고통은 없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의식을 잃거나 죽고 마니까 살아있다면 견디는 거지 고통에도 습관의 수준이 있어 그러니까, 고통을 견뎌내는 자기 한계선을 높여 놓아야 해 평탄한 길만 걷는 자들은 고원 길이 힘들다 하겠지 젊은 날엔 희박한 공기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봐야 해 더 높은 길을 탐험해 본 자에게 고원쯤은 산책 길일 테니까 자신의 두 발로 생존 배낭을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묵직이 올라서던 심장이 터질 듯한 그 벅찬 길이 자긍심이 되고 그리움이 될 테니까 사람들은 정작 자기 시대가 얼마나 좋은 시대인지를 모르지 나만 고통스럽고 나만 불행하고 나만 억울하다고 체념하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고통은 물리적 몰락이나 통증이 아냐 심리적 몰락이고 ..

한줄 詩 2022.06.02

그림자의 변명 - 우혁

그림자의 변명 - 우혁 조금 덥다 싶은 날이면 허투루 흩어놓은 듯한 철자들을 찾아보아요 성급할 것도 없는 오후, 오전부터 쌓인 별은 자신의 퇴적층에서 당신의 눈을 화석처럼 발견하곤 할 거예요 눈물을 닦으라던 닦으라고 애원하던 오래된 노랫말은 '무엇인가 꽉 찬' 지면 위에 라벨처럼 붙어 있어요 그러다 당신은 무심결에 툭 치고 지나가기도 해요 몸 바뀐 그림자 난 사랑을 그렇게 부르곤 했어요 없음에 대한 기록들 있어 본 적이 없는 운명들을 종종 잘못된 발음으로 발화해요 괜찮아요 오자를 찾는 일이 아니에요 있어달라는 애원이었죠 이럴 때 흘리는 눈물은 제법 알 굵은 호박색이랍니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바람 - 우혁 -몸 밖의 모든 것은 푸르다 돌아올 때는 언제일지 몰라도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네 눈..

한줄 詩 2022.06.01

말없이 살아가는 것 - 최규환

말없이 살아가는 것 - 최규환 나무 그늘에 앉아 나무가 하는 말을 듣자니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었을 때 무수하게 쏟아내던 말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받아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만 간직해 두기를 바랐었는데 일곱 번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담기 힘든 말로 인해 무너지는 자구책을 써야만 했습니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방의 성충이 나무의 살을 깎아내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상처를 키워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지면을 버리고 짐을 챙겨 한때 수몰지구였던 근처에 가서 잎이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눈물이 내려앉을 때였는데 나무가 내게 쏟아내는 말이 너무 많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종이 한 장에 달빛만 얹어 돌아왔습니다 *시집/ 설명..

한줄 詩 2022.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