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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물고기 서쪽 하늘로 사라지다 - 부정일

금빛 물고기 서쪽 하늘로 사라지다 - 부정일 어항 속에서 유영하는 별 같은 것들 그냥 놔두지 못한 것이 죄라면 환란도 모른 채 연못에다 가두었다는 것이네 흩어진 비늘로 유린의 현장을 증언할 뿐 백로가 서쪽으로 날아갔다는 말에 허공에다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었네 별들은 사라졌는데 남아있는 별 하나 총총걸음만 지난밤의 기억을 삭이고 있네 생은 미완에서 출발하는 미로 같은 것이어서 작은 소홀함이 불행의 씨가 되기도 하네 삶은 카멜레온처럼 온몸으로 절박해야 굶주림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듯이 철모에 꽂혀 있는 솔가지와 풀잎처럼 물레방앗간 그날 밤처럼 은밀해야 부레옥잠을 풀어놓고 그 아래 있어도 없는 듯 별들의 소곤거림을 들을 수 있다네 별들은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배후에서 다른 탄생으로 이 밤도 수없이 윤회..

한줄 詩 2022.09.25

가을에 도착한 말들 - 이기철

가을에 도착한 말들 - 이기철 나무가 봄에 보낸 말들이 가을에 도착했다 열매를 쪼개면 봄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나의 무지는 바람과 햇볕의 전언을 알아듣지 못했다 풋 순이 열매의 몸으로 둥글어지는 동안 아무래도 나는 동시대의 비극에 등한했나 보다 전쟁 뉴스를 보며 밥을 먹고 세 개의 태풍을 맞으면서 희랍 비극을 읽었으니까, 창궐하는 바이러스에 모처럼 지구가 한 가족이 되는 날도 무덤들에게 그곳은 편안하냐고 묻지 않았으니까, 물소리를 따라나서던 한 해의 발이 멈추는 곳에 데리고 오던 생을 물끄러미 세워 둔다 나무에게도 나에게도 생이란 것은 무거운 것이니까, 몸이 야윈 바람이 텅스텐 소리를 내면 더는 수정할 수 없는 문장을 종이 위에 눌러 쓴다 열매의 말은 페이지가 너무 많아 손가락에 침 묻혀 넘겨도 다..

한줄 詩 2022.09.23

가을 새벽 잠 깨어 보면 - 홍신선

가을 새벽 잠 깨어 보면 - 홍신선 돌아누운 내 등 뒤로 굽이치는 맑은 강물 소리 범람하는 실솔들 울음소리에 이내 잠도 꿈도 몽땅 떠내려가 버리고 고요에 귀를 대이면 이 고요를 강탈해 더 깊은 고요에 가 터놓는 경로당 앞 고목의 낙엽 흩는 소리. 누군가 먼 길 가는 신발이라도 찾아 신나 보다. 고래실 건넛집 안뜰에 불이 환하고 나도 이제는 마음 툭툭 털어 가진 것 모두 내려놓아야 하리. 실솔들의 강물 소리 말라 잦고 지난 잎들 다 떨구어야 비로소 헐벗은 체 본래에 돌아 가는 겨울 적막 앞에 마악 서기 직전 나무처럼. 가을 새벽 잠 깨어 보면.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내 안의 절집 - 홍신선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한줄 詩 2022.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