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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공부 - 문신

저녁 공부 - 문신 감나무 잎에 빗줄기 들이치는 것 지켜보다가 낡은 서가에서 책 꺼내 오는 일을 잊었다 빗소리 차근차근한 저녁에 공부하는 일은 애당초 틀려먹은 일 차라리 행인처럼 낯설게 두리번거리는 저녁을 공부하기로 한다 저녁은 본문 사이에 낀 인용문처럼 다소는 어색하게 굴기로 작정한 모양으로 스멀거리고 이마를 들면 꼭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길목에 저녁이 걸려 있다 이런 저녁이면 어른들은 술동무를 찾아 끄덕끄덕 빗줄기를 헤집어대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발목까지 젖어드는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일은 저 감나무 앞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장을 캄캄하게 옮겨 적는 일 그런 뒤 비 그친 감나무 잎 그늘에 낡은 의자를 내다 놓고 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캄캄한 문장을 팔팔 끓는 목청으로 읊어대는 ..

한줄 詩 2022.06.05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시인이 신간 시집 를 냈다. 이전의 시집이 언제 나왔나 봤더니 2010년이다. 그 시집도 12년 만에 냈다던데 다시 12년 후에 새 시집이 나온 것이다. 이전 시집처럼 이 시집도 성경처럼 두껍다. 500 페이지가 넘는다. 실제 그의 시집은 성경 읽는 것처럼 곁에 두고 틈틈히 읽어야 한다. 단숨에 읽더라도 질리지는 않는다. 노동시를 많이 썼던 초기 시가 다소 압박감을 줬다면 요즘 시는 힘을 많이 뺐다. 그래서 예전 시에 비해 훨씬 부담 없이 읽힌다. 그렇다고 무게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가 치밀한 문학적 구조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에 머리 쥐어 뜯으며 읽을 필요는 없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아! 이런 생각 때문에 시인은 다르구나"를 중얼거리게 된다고 할까. 시인은 시대에 맞서 싸우다 사..

네줄 冊 2022.06.05

막차는 오는데 - 부정일

막차는 오는데 - 부정일 하필 전염병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할 때 벚꽃 흐드러지게 핀 길 따라 간 요양병원은 잠시 몸 추스를 동안 머물 곳인 줄 알았네 애들 한번 못 보고 요양병원에 누워만 있다가 꿈인 듯 순간에 찾아온 막차에 올라 도착한 곳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든 가족묘지 한 자리를 택해 누우니 애들이 곡을 하네 손자는 훌쩍이고 아내는 멍하니 보네 어릴 적 병치레로 애먹인 셋째 딸이 슬프게 우네 누구에게나 결국 막차는 오는데 필십 중반 이미 볼 장 다 보았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 더 보려고 하겠는가 아내여 먼저 와 자리 잡고 있으니 조금 있다 오시게 덜컹거리며 장의업체 포클레인이 가네 모두가 모여 차례로 막잔 올리며 절을 하네 봉긋봉긋 봉분들 팔 벌려 나란히 선 가족묘지에 나 홀로 두고 늙..

한줄 詩 2022.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