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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순하고 착해서 - 정채경

삶이 순하고 착해서 - 정채경 이모는 아기처럼 쌔근쌔근 잠을 잘 잔다 남편의 강짜에 눈 밑에 퍼렇게 그늘이 내려앉아도 사고로 남편을 보내고 주위에 떠밀려 소송을 준비하던 때도 절대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내비치지 않았다 남편을 땅에 묻고도 끄덕끄덕 잠은 오고 꼬르륵 주린 배는 밥을 달라 아우성이더라 때맞춰 밥 먹고 잠 한숨 자고 나면 다 살아지더라고 나이 서른다섯에 혼자되어 자식 셋을 키울 때 팔자 고칠 뻔한 남자가 있었다 끼니를 거르고 남자를 경계하는 자식들의 불안한 눈빛 때문에 돌부리 자갈길을 몇 날 며칠 터벅터벅 혼자 걸었다고 이제 편히 모신다며 요양원을 알아보느라 분주한 아들 자식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이모는 더없이 행복하다 결혼하는 손자에게 자신의 집까지 내어 주고 그저 잘 먹고 한잠 자고 나면..

한줄 詩 2022.06.08

망막하다 - 박수서

망막하다 - 박수서 창문을 닫다 창밖을 보니 달이 무당벌레처럼 동그랗고 예뻐 한참을 바라보다 심야영화관 영사기처럼 잘 때를 놓쳤어 구슬치기 구슬 알처럼 사방팔방 방안을 굴러다니다 한쪽 구석에 겨우 박혀 소등했겠지 피곤한 아침 세수하러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는데 왼쪽 눈이 토끼 눈이네 실핏줄 터진 눈이 아무래도 신경 쓰여 읍내 안과에 갔어 의사는 혈관을 살펴보자 안구 엑스레이를 찍고 둘이 모니터를 보는데, 망막하데 망막 원둘레에 간신히 닿지 않은 검은 점 하나 혈관 끝에 박혀 있는 거야 강아지나 고양이 기생충이 눈에 들어가 되어버린 상처일 수 있고 만약 상처가 커진다면 망막을 덮어 앞을 못 볼 수 있다는 거야 아, 살며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상처의 성장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 그것이 자랄지, 즐겁게..

한줄 詩 2022.06.06

학생부군신위 - 이우근

학생부군신위 - 이우근 제사 때, 아들이 물었다 할아버지는 무슨 학생이셨고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니 애비 먹이고 가르치려 삶을 실천했다고, 그만한 공부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이미 신(神)의 위치에서 책임 없는 하늘에서 떵떵거리며 사실 것이다 지상에서 못한 거 화풀이로 횡포를 부리면서 창밖을 봤다 그 쓸쓸함의 생애가 사무친다.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경강선 - 이우근 곤지암에서 경강선 전철을 탔다 세종대왕릉 역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지 못해 대왕(大王)에게로 걸어서 갔다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왕릉에서 가만히 종일 잘 놀았다 김밥의 단무지와 홍당무와 시금치의 색깔이 그리 고운 줄 몰랐다 단촐한 소풍이었다 과정과 결과가 다 아쉬웠지만..

한줄 詩 2022.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