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746

사진 속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 김륭

사진 속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 김륭 찰칵, 한순간이다, 한 번 갇히면 도망갈 수 없다. 백 년이 가고 천 년이 가도 아이처럼 해맑아서 무덤 속으로도 발을 내릴 수 없다 도라지꽃밭 같았다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밤을 당신의 발처럼 만질 수 있는 곳. 모든 세상이 거짓말 같아서, 도라지꽃이 필 때도 도라지꽃이 질 때도 사람은 사람을 끝내 고쳐 쓸 수 없어서 사진 속에서 희멀겋게 웃고 있는 당신을 꺼내 발톱을 깎아 준다. 오늘은 내가 좀 착해진 것 같다. 느닷없이 이 형용사는 살 같다. 그래서 당신은 웃고 나는 울고 기억이란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의 뼈, 그러니까 촉망받는 주검들의 이야기. 당신 덕분이라고 쓸 수 있다. 언제부터 내 사랑은 골동품 상점의 고문서가 되어 버렸을까. 아버지,..

한줄 詩 2022.05.28

봄이 하는 일 - 류시화

봄이 하는 일 - 류시화 부드럽게 하고, 틈새로 내밀고, 물방울 모으고 서리 묻은 이마 녹이고 움츠렸던 근육 멀리까지 뻗고 단단한 껍질 부수고 아직은 약한 햇빛 뼛속으로 끌어들이고 늦눈 대비해 촉의 대담함 자제시키고 어린 꽃마다 술 달린 가리개 걸어 주고 북두칠성의 국자 기울여 비를 내리고 울대 약한 새들 노래 연습시키고 발목 겹질린 철새 엉덩이 때려 떠나게 하고 소리 없이 내린 눈 물소리로 흐르게 하고 낮의 길이 최대한 늘리고 속수무책으로 올라오는 꽃대 길이 계산하고 숨겨 둔 물감 전부 꺼내 오고 자신 없어 하는 봉오리들 전부 얼굴 쳐들게 하고 곤충의 겹눈에서 비늘 벗기고 꽃잠 깨워 온몸으로 춤출 준비하고 존재할 충분한 이유 찾아내고 가진 것 남김없이 사용하고 작년과 다른 방향으로 촉수 나아가게 하고 ..

한줄 詩 2022.05.27

검은 악보 - 신철규

검은 악보 - 신철규 중부고속도로에서 형체가 너무 뚜렷한 사체를 보았다 고양이인지 개인지 확인할 시간도 없이 지나쳤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지른다 아무리 낭만적이거나 과격한 노래를 틀어놓아도 사라지지 않는 경악 가두지 못한 눈물이 쏟아지고 거두지 못한 부은 발은 내 뒤에 남아 있다 구겨진 심장이 펴지지 않는다 상하행선을 가르는 시멘트 분리대 근처에서 넘어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던 그것은 한참을 망설이다 머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 그리고 번개처럼 지나간 둔기에 튕겨져 분리대에 다시 몸을 부딪치고 쓰러졌을 것이다 생생한 죽음은 싱싱한 주검이 되어갈 것이다 핏물이 번지고 흐르다가 말라붙을 것이다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분리대에 막혀 보이지도 않을 것이..

한줄 詩 2022.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