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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진금지 - 김명기

직진금지 - 김명기 직진금지 표지판 앞에서 그대로 내달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고 살라고 말했지만 쳐다본 곳까지 오르지 못한 채 엄나무뿌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긴 시간 아버지는 세 시 방향 나는 아홉 시 방향으로 꺾어져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간혹 여섯 시 방향을 향해 돌아섰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혈연의 회한을 확인할 뿐이었다 생각과 몸은 바뀌어 갔으나 열두 시 방향에서 만난 적은 없다 아버지가 생의 간판을 접고 폐업하는 순간에도 나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 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경험의 오류를 너무 확신했다 어쩌다 녹슨 족보에서나 쓸쓸하게 발견될 이름들이 숱한 금기 앞에서 내버린 시간 껴안지도 돌아보지도 못한..

한줄 詩 2022.06.18

식물 합니다 - 김륭

식물 합니다 - 김륭 식물 합시다, 이 말을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면 변한다. 아파트에서 요양병원으로 주거지를 옮긴 엄마의 자서전엔 그렇게 나온다. 식물은 꼬리 대신 머리를 흔든다. 입을 발밑으로 떨어뜨려 하늘이 내려오길 기다리는 자세, 가만히 누워만 있는 당신을 내려다보면 죽음을 초월해 한 번 더 사는 기분. 잘 팔리는 시집 제목에 목줄을 묶어 바람 쐬러 간다. 없는 애인이 따라나설 때도 있지만 아주 드문 일이다. 잘생긴 이팝나무 하나 골라 밤에게 이야기하듯 볼일을 보다가 문득 나를 데려오지 않았단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미쳤나 봐, 언제까지 머리를 꼬리처럼 흔들어야 되는 걸까. 잘 팔리는 시집 속에는 뿌리를 꼬리로 사용해 춤을 추는 부족들이 산다고 했다. 땅만 보고 걷다 보면 가까워지는 나무의 잠, 속..

한줄 詩 2022.06.17

소문처럼 너는 가고 - 강회진

소문처럼 너는 가고 - 강회진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소문처럼 들었다 마치 모두가 잠든 밤 너는 폭설이 내린 시베리아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 버렸나 급하게 가느라 맨발로 떠난 것 같아 생각하는 나는 손발이 시렸다 가만히 일어나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녹슨 반지를 찾아 손가락에 걸어보았다 마치 이제야 약속이 기억 난 듯 이제 죽고 없는 너와 반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지키지 못한 어떤 약속 하나가 생각났을 뿐 먼 먼 몽골, 전생에 우리는 다섯 번 보다는 더 만났겠지 그러니 여섯 번째 전해들은 너의 마지막 소식은 죽음 누군가의 죽음을 파먹으며 하루를 견딘다 마치 지키지 못한 약속은 차라리 잊는 게 좋다 그러니 이제 서로 안녕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현대시학사 나는 여러 번 죽고 싶다 - 강회진 초승달..

한줄 詩 2022.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