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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바람이 - 변홍철

다른 바람이 - 변홍철 골목 한쪽 꽝꽝 울리던 능소화 모가지들이 뚝뚝 떨어졌다 그들의 말을 채 알아듣기도 전이었다 장마가 퍼붓기 전, 예비검속을 피해 몸을 숨기듯 도피가 아니라 차라리 환멸과 단절하듯 이것은 하나의 의지, 무리 지어 피었어도 언제나 고독했다고 담장 이쪽과 저쪽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고 무심한 발길에 차이기 전에 그중 몇 송이라도 추념 가득한 책장 한쪽에 꺾어두지 못한 것을 서러워 말자 짙은 초록의 허공, 흔들리는 역사의 넝쿨을 차라리 이 시각, 응시할 일 다른 바람이 동네 이곳저곳을 탐문 중이다 *시집/ 이파리 같은 새말 하나/ 삶창 꽃길 - 변홍철 바람 부는 대로 떠밀려도 어느 구석엔가 겹겹이 쌓여 이어지는 길, 다시 바람길 꽃잎이 하얗게 떨어진다 대출이자 독촉처럼 검은 나무 뒤로 눈부..

한줄 詩 2022.06.21

흐르다 멈춘 곳에 섬이 있었다 - 고성만

흐르다 멈춘 곳에 섬이 있었다 - 고성만 내가 한 마리 심해어로 태어나 멀어버린 눈 대신 알록달록 지느러미 흔들어 너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세이렌에 홀려 자욱한 안개 속 방향을 잃었을 때 흐르다 멈춘 길 끝 섬이 있었다 돌계단 돌아 올라 도착한 벼랑 밤새 탑 지키던 등대지기는 깊이 잠들었다 이마에 훤한 불 켜고 뱃길 인도하는 일이 저리 고단한가 검은 여 혹은 갯바위 근처 지나 너 찾아가는 일도 그러하다는 것을 뜨겁게 떨군 눈물, 짜디짠 맛을 보고서야 알게 되듯이 *시집/ 케이블카 타고 달이 지나간다/ 여우난골 파다하다 - 고성만 저수지 뒤쪽 노을이 붉다 노랗고 빨간 지붕 너머 지류의 끝에서 흘러내리는 저녁은 교차로에서 어떤 길로 갈까 망설인다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한줄 詩 2022.06.21

봄의 감정 - 이설야

봄의 감정 - 이설야 봄날, 죽은 등을 갈아 끼운다 불 꺼진 영혼 다시 깜박인다 검은 나뭇잎들 흔들리는 봄의 가장자리 아침마다 죽은 문패들이 바뀐다 집을 버린 문패들은 옛 애인처럼 그렇게 멀리 가지는 못할 것이다 검은 유리는 계속 만들어지고 고양이들은 밤의 감정을 노래한다 서랍 속에서 잠자는 못쓰게 된 달력들 삼월에 내리는 눈처럼 봄을 망쳤던 시계들 몇 년째 죽지도 않는 어항 속 회색 물고기 같은 것들 봄날,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 과욕들 꽃피우려 해도 피지 않는 벼랑 아래로 자꾸만 굴러떨어지는 검은 나뭇잎들 아직 다 가보지 못한 당신 같은 언젠가 당신의 장례식 같은 봄의 감정들 봄날, 죽은 등을 갈아 끼워도 꽃이 피지 않는다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자세 - 이설야 동인..

한줄 詩 2022.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