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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를 가까이 - 김영언

내 주위를 가까이 - 김영언 공기 맑고 인적 드문 낯선 시골로 낭만적인 기분에 들떠 이사를 한 휴일 오후 구부정한 허리와 백발과 지팡이들 대여섯이 반가운 불청객으로 몰려왔다 금방 짜내어서 고소함이 들판을 휘감을 듯 끈끈한 들기름 한 병과 농약 안 주고 하우스 안에서 가족용으로 기른 고춧가루 한 봉지와 오래 두어도 단단하고 맛이 순하다는 토종 마늘 한 접과 텃밭에서 가꾼 꾸밈없는 빛깔의 청치마 상추 서너 포기와 속살이 호박처럼 정겹게 노랗다는 고구마 한 상자가 예고도 하지 않은 집들이를 예고도 없이 왔다 그들은 내 주를 가까이하라고 엄숙한 노래를 불러주고 돌아갔는데 나는 송구스럽게도 그들의 부탁을 다 들어주지는 못하고 다만 내 주위를 가까이하겠노라 기꺼운 다짐을 하였다 첨탑 위 십자가가 아담하게 걸려 있는..

한줄 詩 2022.06.20

없는 사람 - 박용하

없는 사람 - 박용하 그가 침대에 누워 있다는 전화가 여름 빗소리의 밤을 뚫고 쳐들어온다. 죽기 전에 봐야 하지 않겠어요. 형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네 목소리가 거세지는 빗방울과 연합해서 밤의 바닥을 열혈로 두드린다. 두 달 전 그를 바닷가 병원에 입원시키고 얼른 나의 일상으로 돌아와 연락 없길 바라며 지냈다. 두 번이나 옮겨간 병원에서 본 그는 산소마스크를 하고 있었고, 저럴 바엔 하루빨리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애인의 몸을 원하듯이 간절히 원했다. 거친 숨을 내쉬는 그의 사지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아무 짓도 보태지 않고 서둘러 내 그림자를 데리고 밤을 달렸다. 그를 보고 온 다음날 그가 갔다는 기별이 왔다. 그는 나하곤 상극이자 한 지붕 밑에서 공기를 마실 수 없는 사이. 그는 내 피의 반대편 반쪽. ..

한줄 詩 2022.06.19

이유 없는 행복한 이유 하나 - 황현중

이유 없는 행복한 이유 하나 - 황현중 오늘 또다시 길을 떠나는 이유는 이유 없이 떠나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여도 부질없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헛바퀴 돌리는 헛일이라 하여도 늘 제자리인 줄 알면서도 늘 제자리걸음으로 걸음걸음 신나는 순간순간 빛나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비틀거려도 주저앉지 말아야 할 비틀거리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해를 붙들고 빈 가지에 젖은 바람을 흔들며 흔들리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은 흥분보다 무엇이 된 기쁨보다 이유를 유혹하지 않는 이유 없는 행복한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시집/ 너를 흔드는 파문이 좋은 거야/ 그림과책 지천명(知天命)을 위한 기도 - 황현중 수없이 떠나려 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떠나지..

한줄 詩 2022.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