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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멋 - 박노해

진정한 멋 - 박노해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사치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위해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제대로 된 사치는 최고의 절약이고 최고의 자기 절제니까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멋을 간직해야 한다 비할 데 없는 고유한 그 무엇을 위해 나머지를 과감히 비워내는 것 진정한 멋은 궁극의 자기 비움이고 인간 그 자신이 빛나는 것이니까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내가 죽고 싶은 자리 - 박노해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그러나 실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언젠가 어느 날인가 죽음 앞에 세워질 때 나는 무얼 하다 죽고 싶었는가 나는 누구 곁에 죽고 싶었는가 내가 죽고 싶은 자리가 진정 살고 싶은 자리이니 나 지..

한줄 詩 2022.06.26

쌍무지개 피던 날 - 김용태

쌍무지개 피던 날 - 김용태 먼 바다를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추억마저 빈곤했던 유년시절 물사마귀처럼 불거진 일 하나 젖은 얼룩으로 번져 큰물 지던 날 신던 것보다 손에 들고 다녔던 적이 많았던 고무신, 그 한쪽을 속절없이 떠내려 보내고 아버지 눈을 피해 어머니 머리에 인 보리쌀 닷 되, 그 속엔 주린 당신의 여러 끼니와 긴 여름 해 하루치의 노동이 고스란히 똬리로 앉아 남아 구실을 할 수 없던 다른 한쪽을 어떻게 하였는지는 이제 떠오르지 않고 비 갠 서쪽 하늘 위로 쌍무지개만 울멍울멍 피어 올랐던 기억 그날 밤 잠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마른 울음 뒤로 떠내려 보낸 고무신 찾아 먼 바다로 가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면회 - 김용태 가끔씩 다음 생이라도 다녀..

한줄 詩 2022.06.25

어둠이 드는 저녁 들판에 서서 - 류흔

어둠이 드는 저녁 들판에 서서 - 류흔 이런 저녁은 아름다움이 적절해서 벌판에 있는 모두가 안심이다 석양이 점차 물크러지고 저들끼리 깔깔대던 새들은 도처에 찌그러졌다 샤워를 하듯 어둠이 머리 위에서 솨 쏟아진다, 나는 꼴려서 하마 터면 옷을 몽땅 벗을 뻔했지 계절을 강조하며 나무들도 벗는다 그들 아래로 걸어가면 다투어 잎을 던지는 모양이 탁 탁 내게 침을 뱉는 것 같아 마뜩찮고 기분 엿같다 이런 저녁에 검어지는 들판으로 드는 것은 저녁밥이 없는 집으로 터벅 터벅 걸어가는 것과 같겠지만 이만한 어둠이면 족해서 나는 갑자기 기분이 째진다 뒤집어질 만큼 좋아서 어둠마저 뒤집힌다면 아침은 오겠지, 내가 절대적으로 싫어하는 빛이 오겠지, 무지하게 눈부신 애인의 유방 가운데 올연한 갈색의 단단한 어둠을 보겠지 나는..

한줄 詩 2022.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