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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 최백규

장마철 - 최백규 정학과 실직을 동시에 치르고도 여름은 온다 터진 수도관에서 녹물이 흐르고 장롱 뒤 도배된 신문지로 곰팡이가 번지다 못해 썩어들어간다 기름때 찌든 환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습기가 자욱하다 깨진 유리병 옆에 버려둔 감자마저 싹을 흘리고 있다 벌겋게 익은 등 근육 위로 욕설을 할퀴고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다가 마주 보던 사람이 떠올라서 밀린 급여라도 받기 위해 진종일 공사판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전신주에 기대앉아 신발 밑창으로 흙바닥의 침을 짓이기고 불씨 죽은 드럼통이나 해진 목장갑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한다 숨이 차도록 구름이 낮다 신입생 시절 교정에 벽보를 바르던 선배들은 하나같이 폭우를 맞은 표정이었다 화난 얼굴로 외치는 시대와 사랑이 고깃집이나 당구장에 널려 있었고 나는 무단횡단할 때보다..

한줄 詩 2022.06.28

인연도 긴 세월 앞에 부질없어 - 부정일

인연도 긴 세월 앞에 부질없어 - 부정일 빼빼로 데이라는 열하루, 팔십 난 옥금이 누님이 파크골프 치러 회천 구장에 왔네 초이튿날 동갑 영감 먼 길 보내고 벌써 맘 추슬러 평소처럼 곱게 차려입고 공 치러 왔네 있는 듯 없는 무심한 빈자리 오래 산 날들에 묻혀 사소한 일은 아니었지만 공 치러 왔네 폐암으로 먼 길 떠난 영감이야 교장으로 퇴직한 몸이었으니 애들 데리고 뭍으로 수영여행 떠난 것만 같고 안부를 묻는 빈말들이 더 야속한 오늘 같은 날은 일부러 부침개라도 부쳐야 할 것 같은데 한때는 영감의 퇴근을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할 때 분홍 빛깔 떨림 같은 것도 가물가물하니 가야 하는 길, 나 두고 여행 가듯 떠난 사람 인연도 오래 산 세월 앞에 부질없어라 운동 삼아 매일 치던 파크골프도 두 달 넘겨 왔으니 공..

한줄 詩 2022.06.28

깻잎 투쟁기 - 우춘희

예전에 제주 둘레길을 걸은 적이 있다. 근 8개월 동안 다섯 번에 걸쳐 며칠씩 걸어 둘레길 완주를 했다. 제주까지는 비행기였지만 이후는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해 둘레길을 걸었다. 그때 길에서 만난 제주의 농작물 밭을 수없이 봤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말을 걸어 봐서가 아니라 외모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시종 자기들 말로 웃고 떠들면서 일을 했지만 그들의 노동이 안쓰럽기도 했다. 누구는 저렇게 뙤약볕에서 고된 일을 하는데 나는 한가하게 둘레길을 걷고 있다는 미안함도 들었다. 이 책은 우춘희 선생이 두 달간 실제 깻잎을 따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한 경험을 쓴 것이다. 유독 캄보디아 사람들이 깻잎 농장에 많이 일한다고 한다. 어디 깻잎 농장뿐이던가. 시골 농부들 말에 의하면 외국인..

네줄 冊 2022.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