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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가장 좋다 - 손남숙

지금이 가장 좋다 - 손남숙 밤하늘이 한 발자국씩 이동하고 있다 겨울에서 봄이 오고 있다 아득하던 오리온 별자리가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빛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고 지구는 돌아가고 우리의 이별은 차고 이지러지는 달처럼 자연스럽다 삼월의 마늘밭은 아침이면 더 푸르게 목을 늘일 것이다 저 계절에서 이 계절로 넘어온 깊은 물결 나의 남루함이 새로운 남루함을 걸친다 해도 따스하게 반겨야 할 얼굴이 있다 매일 달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듯이 어떤 계절에 걸쳐진 밝음은 어두운 숲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어쩌면 너의 가장 아름다울 시절이 여기에 나는 지금이 좋다 착하고 명랑하게 매일 눈뜨는 아침이 *시집/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 걷는사람 들판은 나의 것 - 손남숙 들판을 걸어갈 때면 주인이 누구든 논에..

한줄 詩 2021.03.07

지난번처럼 - 이산하

지난번처럼 - 이산하 제주도 예맨 난민문제로 강자의 숨은 발톱이 드러나고 약자를 추방시키는 국민청원에 수십만 명이 달려들 때 난 동유럽의 나치 강제수용소들을 성지순례 중이었다. 어느날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를 찾아 헤매다가 중앙광장 근처 거의 텅 빈 마트의 진열장이 눈에 띄었다. 마트 유리문에 붙은 독일어 공고문을 친구가 번역해주었다. 친애하는 고객 여러분 어제 갑자기 갓난아기와 어린애들이 포함된 200여 명의 난민을 실은 버스들이 도착했습니다. 저희들은 난민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매장의 모든 식료품들을 구호품으로 보냈습니다. 너무나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새로운 물품들은 이미 주문해놓았으며 거듭 양해를 바랍니다. 지난번처럼 고객 여러분의 마음을 믿습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한줄 詩 2021.03.07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하재영

잔잔하게 울림을 주는 좋은 책을 읽었다. 문장에 글쓴이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정체성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럴 듯하게 인생을 꾸며낼 능력이 있는 작가들은 더할 것이다. 그걸 감안하고 읽어도 이 책은 감동적이다. 내가 집에 대한 생각이 유난히 애틋하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누가 지은 건지는 몰라도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소박한 문장을 좋아한다. 집을 편안한 보금자리로 여기는 것보다 시장 값어치로의 판단이 앞서는 시대이기에 이 책의 울림은 더욱 크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작가 하재영은 어릴 적 집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한다. 나도 어릴 적 살았던 집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집 도면을 뚝딱 그릴 수 있을 만큼 뚜렷하다. 마당 모퉁이에 장독대..

네줄 冊 2021.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