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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반으로 잘라 사과처럼 먹었다 - 김태완

슬픔을 반으로 잘라 사과처럼 먹었다 - 김태완 슬픔은 먹는 것이다 먹먹한 입 안으로 넣어 강물처럼 가슴으로 흘려보내듯 지나온 시간들이 인화된 사진처럼 압축된 순간이 될 때 그리운 기억은 눈으로 먹는 것이다 한 끼 밥이 주는 위안처럼 너를 위로하는 그 순간에도 눈물을 밀어넣는 손길에도 내 눈물이 너를 지키는 것이다 순간의 사실들이 모진 속도에 굴복할 때 곁을 지키는 뜨거운 슬픔을 키워내는 것이다 빈 방, 들어온 달빛 사람의 소리를 먹고 고즈넉하게 누워있는 자리 여백을 깔아놓고 너와 나 사이 아픔의 중력을 가늠하고 있다 이제 나를 꺼내주오, 이제 나를 가둬주오, 매일 문을 두드리는 이 변격의 슬픔, 모진 슬픔보다 더 깊은 슬픔은 둥근 형태인가 가만히 둥근 빛을 바닥에 뉘이고 그 은밀한 속살을 반으로 싹둑 잘..

한줄 詩 2021.03.03

안개는 끝나지 않았다 - 조하은

안개는 끝나지 않았다 - 조하은 어느 날 세상 끝 어딘가에 도착해 있으리라 생각했지 꼴 베던 논둑길을 지나 바람의 언덕에서 피리를 불었네 한 소녀를 향한 연정이 스치고 지나갔던 어떤 풀밭은 잠시 누워 있는 동안 빨리 사라지고 어디만큼 왔을까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돌아갈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네 연밥 안에 자리 잡은 단단한 씨앗처럼 다만 햇빛 아래 익어가고 싶었는데 주점 담벼락에 쏟아내던 세상을 향한 울분 위로 흐느끼는 한 사람 보내고 주저앉아 울어버렸네 세상은 온통 안개에 덮여 있고 얼음꽃은 오랫동안 녹지 않았다네 컨베이어 벨트에 빨려든 친구의 손에는 늘 릴케의 시집 가 들려 있었다네 목마름의 끝은 거기였냐고 묻고 싶은 밤이네 가득하고 싶던 삶은 텅 빈 채 끝나지 않은 그의 이야기 지금 어디쯤 표류해 있..

한줄 詩 2021.03.02

외로운 이름들 - 여태천

외로운 이름들 - 여태천 전기를 읽을 때마다 궁금했어. 거미줄 같은 손금 촘촘한 무늬를 따라가면 마지막 이별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생일날의 기분이라도 하루 일과를 끝내는 순서라도 떨어지는 별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늦도록 노래를 불렀겠지. 다시 어제의 일을 빼곡히 쓰게 한다면 뭐라고 적을까. 전기를 펼치면 모든 글자들은 바둑의 돌처럼 가지런하지. 한 사람의 일생이란 원래 사후적으로 완성되는 것. 그도 모르는 일들이 그의 전기가 되고 바람을 안고 비와 나눴던 시간은 온데간데없는 전기를 빨리 읽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해서 서툰 글씨로 이름을 수차례 적어 보지. 그래도 서운해서 쓸쓸한 이름을 나직이 불러 보지. 그러면 가로수의 잎처럼 가지런하게 생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같은 곳에서 태어..

한줄 詩 2021.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