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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의 유장한 말씀 - 배정숙

다섯 번째 계절의 유장한 말씀 - 배정숙 찌그러진 양재기에 보조개가 파인다 양 볼이 살팍해지는 소리 귓볼이 경쾌하고 환승하여 혀끝이 배부르고 환승하여 식도가 따듯하고 다시 환승하여 심장이 환하고 가로등엔 불이 켜진다 목마르게 우러르는 저 은총의 젓가락이 납작 엎드린 밥숟가락위에 포옥 빛의 알을 슬어 얹는다 이런 것 저런 것 퉁 쳐 봐야 한 뼘의 궁리조차 번번이 도막 나 버리지만 그보다 더 기막힌 기사를 덮고 더 깊은 울음 밑으로 순순히 몸을 뉘는 이여 저녁 새참처럼 잠깐 스치는 역광이 재재거리며 지나가고 하루치의 수행을 요약한 빈 소주병이 불콰한 저물녘인데 여전히 자유의 눈알만 붉다 풀썩 어두워지던 밤이 드디어 코앞에서 주저앉는다 그러면 그 때는 필경 맞이할 내일의 이름을 신에게 물으리 턱을 괴고 고민하..

한줄 詩 2021.03.06

3월과 - 홍지호

3월과 - 홍지호 가을 같다고 했다 이미 잃어버린 자리라고도 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없었다 모두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 이라고도 했다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들리지 않는 비명이 너무 많았다 들리지 않아서 슬픈 노래와 비유를 바람이 보여주고 있었다 가벼워서 꽃잎이 가라앉는 것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가벼워져서 가벼워져서 가라앉지도 않으면 들어도 들어도 슬픈 노래를 들려줄게 가을 같다고 했다 곧 겨울이 올 것 같아서, 라고도 했다 *시집/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문학동네 수요일 - 홍지호 -환절기 단숨에 온 것으로 혼동하지만 서서히 도달한 모든 계절과 계절이 함께 머무는 거처에서는 구별이 어렵다 어느 계절의 손을 잡아야 할지 이맘때면 호흡이 어렵다..

한줄 詩 2021.03.06

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 피재현

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 피재현 자주 부음이 와 가을과 겨울 사이 봄과 가을 사이는 늘 그래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죽고 거래처 사장의 장모가 죽기도 해 가끔씩 부음이 오면, 한 생애가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잠깐 궁금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 보관함을 뒤져도 아버지 장례에 그들이 내 부의금을 확인하는 게 먼저야 그들의 조문을 기억하지 못하거든 장례 내내 나는 아버지가 미웠고 아버지가 불쌍했고 아버지가 슬펐거든 아직 겨울이 시작되지 않았어 유실수의 어깨에는 무거운 열매들이 얹혀 있고 아직 바람이 못 견디게 차지는 않아 사실 죽음이 그리 슬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려울 뿐 선친의 죽음이 그저 그런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사실은 그저 그런 일인데 우리도 그처럼 죽을 테고 난 좀 ..

한줄 詩 2021.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