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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 김희준

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 김희준 글을 모르는 당신에게서 편지가 왔다 흙이 핥아주는 방향으로 순한 우표가 붙어 있었다 숨소리가 행간을 바꾸어도 정갈한 여백은 맑아서 읽어낼 수 없었다 문장의 쉼표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태양은 완연하게 여름의 것이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선 계절을 팔았다 설탕 친 옥수수와 사슴이 남긴 산딸기 오디를 바람의 개수대로 담았다 간혹 꾸덕하게 말린 구름을 팔기도 했다 속이 덜 찬 그늘이 늙은호박 곁에 제 몸을 누이면 나만 두고 가버린 당신이 생각났다 찐 옥수수 한 봉지 손에 들었다 입안으로 고이는 단 바람이 평상에 먼저 가 앉았다 늦여름이 혀로 눌어붙고 해바라기와 숨바꼭질을 하던 나는 당신 등에 기대 달콤한 낮잠을 꾸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보지 않고도 키가 자란다 기다리는 마음..

한줄 詩 2021.03.08

나는 보수 중이다 - 정선희

나는 보수 중이다 - 정선희 ​ 한 달 전에도 두 달 전에도 여전히 옆집은 보수 중이다 1층과 2층을 분리해야 해요 집안으로 난 계단을 없애고 밖으로 계단을 새로 만드세요 각자의 대문을 갖는 게 좋아요 커다란 통유리로 거실을 마당까지 확장해 보세요 이 사람 저 사람의 충고를 들으며 집은 점점 복잡해졌다 아직까지 집은 완성되지 않았다 남자가 내게 물었다 새 여자를 들이는 게 나을까요? 애들 엄마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까요? 애들 엄마는 아이 셋을 두고 바람 많은 5월의 녹색을 따라 집을 나갔다 새 여자는 남자의 행복을 위해 밥을 한다는 여자였다 나는 낡은 집은 싹 허물고 새로 짓는 게 낫다고 했다 나는 어때요? 남자는 빤히 나룰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보수 중이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

한줄 詩 2021.03.08

수선화 전입 - 박병란

수선화 전입 - 박병란 섬의 앞마당에는 바람이 전부였다 햇살이 바람을 이길 수 없는 곳 바람 없는 날도 바람을 볼 수 있는 곳 키 큰 나무 몇 그루라곤 죽은 전봇대가 유일하게 살아 줄을 타는 곳 전깃줄에 앉아 똥을 싸는 까마귀의 일몰과 시차를 겪는 수선화의 입장 전입한다고 다 주민이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이쪽으로 돌아눕다가 저쪽을 기별하는 물잔디같이 납작한 말 천천히 듣다보면 좌표 잃은 바람처럼 딱지 앉는 말 여기서 나는 익명이었다 방편 없이 문을 나서는 외지인의 등 뒤로 소란 없는 바람의 착지 참견만큼 친절한 것이 또 있겠는가 생각한다 수선화가 피어난다 표정을 표정으로 갚지 않으며 서두르지 않으며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북인 화답 - 박병란 핀 꽃보다 피지 않은 멍울을 더 많이 담..

한줄 詩 2021.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