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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의 경계에서 - 조하은

기간의 경계에서 - 조하은 가장 뾰족한 시간을 넘었다 생각했는데 시간은 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무처럼 몸에 새기는 것이었는지도 새순이 올라올 때의 그 간지러운 설렘이 몸을 적실 때에도 엇나간 박자가 삶을 두들겨댈 때에도 당신과의 추억은 나를 숨 쉬게 하는 마술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과 가장 빠른 시간이 만나는 지점에 오늘은 서 있다 어쩌면 세상은 두 눈 감을 때 품고 갈 마지막 이름과 지우고 싶은 시간 속에 있는 사람 사이의 전쟁 천사의 날개와 반월도를 들고 시간의 신을 베고 싶은 오늘 시간의 속도는 가차 없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비문증 - 조하은 눈에 파리가 날아다녀요 작은 날파리부터 온갖 날개 달린 것들이 날아다닐 겁니다 의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딱히 약은 없습니다 너무 많이..

한줄 詩 2021.04.02

그믐달 - 심명수

그믐달 - 심명수 뚜껑은 열리고 밤은 아직 발효 중이다 밤의 항아리 속이 구리다고 속단하지 말자 지문을 찍어본 사람이면 알리라 판이하게 드러나는 음과 양 나는 그 음과 양의 어두운 항아리 속에 가라앉아 있다 한 여자가 침몰된 나를 한 바가지 떠간다 먹먹하다 날숨에서 피어나는 별들 별은 항아리 속 숨구멍 나는 무엇인가에 자꾸 익숙해지는 걸까 다시 한 여자 얼굴이 떴다 여자는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오곤 한다 지상에서 아직도 여자는 그 구간을 흐른다 여자여, 그만 뚜껑을 닫아주오 아, 나는 항아리 속에서 발효 중이다 피안을 위한 침잠 밤은 이제 뚜껑을 닫고 밤물결 따라 노를 젓는다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상상인 그 노총각이 쓸쓸하다 - 심명수 난로 위 주전자, 주전자가 열이 바짝 올라 있다 꼭지 달..

한줄 詩 2021.04.02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 이원하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 이원하 몸을 녹이기 위해 창문을 닫으니 잘살아 보라는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속을 드러냅니다 나는 가뿐해진 몸으로 개 대신 기르는 신경초를 건드립니다 건드리니 신경초의 어깨가 움츠러듭니다 내 손이 아직 차가운가봅니다 몸을 제대로 녹이기엔 난방이 좋지만 가스통은 회색이라 아껴야 합니다 속을 알 수 없으니 일단 아껴야 합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게 사람을 닮았습니다 닮았다니까 좋은가요? 움직이는 신경초가 얼마나 예민하게요 대답해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눈이 내려도 밖으로 나와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무너지듯 주저앉아 울 수 있는 의자를 하나 살까요 사람 때문에 무너져본 적 없는 잘 살던 의자를요 아니다, 앞으로 자주 울지 않을 거니까 아무 의자나 살까요 고민이네요 자고 ..

한줄 詩 2021.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