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746

화들짝, 봄 - 김정수

화들짝, 봄 - 김정수 노총각 동생이 집을 나간 후부터 서울역 지하도 지나다닐 때마다 흘깃, 등 돌리는 얼굴들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느닷없이 검은 손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코 틀어막은 손가락 두 개 길을 종종댔다 가출한 동정은 따스한 눈으로 건너와 두 손에 건네지는 차가운 금속성, 혹은 쨍그랑 앞뒤로 젖혀지는 하루의 질책 외따로 떨어져 잠든 종이박스 왈칵 들춰보고 싶은 충동에 등 푸른 계단 아래로 굽고 마지막 통화와 함께 사라진 욕설 화석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서울을 떠날 때마다 뒤 돌아보는, 세 살 터울 같은 습관 네모난 풍경에 갇히고 계절마다 찾아오는 잦은 외출이 해감 될 즈음 면역력 약한 삶 하나가 환절기를 넘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랜 세월 귀에 머물던 절벽의 야유에서 이명의..

한줄 詩 2021.04.03

배추밭 - 황형철

배추밭 - 황형철 하루가 다르게 배춧잎이 쑥쑥 자라는 것은 하늘에 가 닿으려는 배추벌레가 열심히 배밀이하며 길 내기 때문이지 널찍한 배추밭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은 잠자리에 든 배추벌레가 떼 지어 하늘을 나는 꿈꾸기 때문이지 나비 날개가 둥글디둥근 것은 이파리 갉아먹으며 숭숭 구멍 내던 어릴 적을 필시 기억하기 때문이지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4월 동백 - 황형철 -섬3 청명을 앞뒀는데 이름도 무색하게 동백이 한창이다 큰넓궤에도 피고 너븐숭이에도 피고 빌레못굴에도 피고 섯알오름에도 피고 송령이골에도 피었다 바람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파도 덮쳐도 꺼지지 않게 애지중지 겹겹으로 불씨 에워싸 금방이라도 타오르겠다는 듯 환하지만 삼촌이 건넨 식은 지슬 같아서 어멍이 잡아준 마지막 손길 같아서 누군가 ..

한줄 詩 2021.04.03

먼지의 무게 - 이산하

먼지의 무게 - 이산하 ​ 복사꽃 지는 어느 봄날 강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밥을 지었다. 쌀이 익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저녁노을 아래 밥이 뜸 들어갈 무렵 강 건너 논으로 물이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네팔의 한 화장터가 떠올랐다. '퍽!' '퍽!' 여기저기 불길 속으로 머리들이 터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뇌수를 개들이 핥아먹었고 아이들은 붉은 잿더미를 파헤쳐 금붙이를 찾았다. 인간이 재로 바뀌는 건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가난한 집의 시신들은 장작 살 돈이 부족해 절반만 태운 채 강물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들은 언제나 머리를 가장 먼저 불태운 다음 마지막으로 두 발을 태웠다. 나는 한동안 생각을 지탱한 머리와 세상을 지탱한 발을 비교하며 삶의 무게를 저울질하다 재처럼 풀썩이고 말았다. 인간이 ..

한줄 詩 2021.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