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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이유 - 백인덕

애도의 이유 - 백인덕 안경을 닦으며 걷는다 맹목의 순간이 느리게 이어지다 간혹 뚜렷해지는 사물들, 붉게 우는 우체통을 지나면 마주칠 때마다 건빵을 건네주는 선지자가 있다 길에는 늘 구원이 있고 제멋대로 흐르는 죽음도 있고 그러나 길은 어디로도 닿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가슴 높이 부지런히 양손을 움직여 안경을 닦는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을 너무 많이 본 안 봐도 되는 것을 열심히 본 마땅히 봤어야 할 것을 안 본 나와 시대와 세계와 우주 아이가 흘린 과자를 쥐고 순식간에 나무 위로 올라가는 다람쥐 제 그림자에 환한 모자 하나 씌워주지 못한 불기(不起)의 게으름이 오돌오돌 발밑에서 솟아오르는 여기-지금 불멸(不滅)이라니, 아무 겨냥도 없는 종소리 살 틈을 파고든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한줄 詩 2021.04.06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었다 - 김태완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었다 - 김태완 오래 전 읽었던 책의 접힌 부분을 편다 발효된 향기로 다가오는 눅눅한 시간 곱게 접었던 자리를 펴자 우수수 쏟아지는 그리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접어두었던 걸까 늘 소리내어 읽지 않았다 묵음으로 낭독되어 쌓여진 의미들이 내 몸으로 들어와 늘 접혀진다 너를 읽는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어느 줄거리에서 끊어진 맥락이 울고 있거나 편안한 저녁은 며칠이 지나 찾아왔다. 너의 쓸쓸한 문장이 나를 찾을까 오래 전 다짐한 약속처럼 눈물 머금은 너를 다독이며 한 장의 아픔을 넘긴다 접힌 흔적이 묵음의 무게에 천천히 소멸될 즈음 비로소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 되었다. *시집/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북인 싱겁다 - 김태완 예상했던 대로 가는 건 싱겁다 끝이 생각했던 대로 끝이 되는..

한줄 詩 2021.04.06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 천수호 시집

드디어 천수호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냈다. 일상에서 드디어라는 단어를 쓸 곳이 여럿 있기에 나도 여기에서 드디어를 쓴다. 어쩌면 그의 세 번째 시집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드디어가 더 반갑게 느껴진다. 남자 이름처럼 들리지만 천수호 시인은 여성이다. 꾸준하게 시를 쓰는 비교적 모범 시인에 속한다. 이 시집에 붙이는 드디어라는 부사도, 모범 시인 호칭도 내 맘대로 내린 결정이다. 평소 생각이 적어도 세 권쯤 시집을 내야 시인이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다고 본다. 시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가늠할 수 있을 때도 그 시인의 시를 세 권쯤 읽어야 한다. 이 시인도 드디어 나온 세 번째 시집에서 절정에 달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시집이, 두 번째 시집보다 이번 시집이 완성도가 높다. 시인은 동의 안 할지 모르나 내 ..

네줄 冊 2021.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