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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구역 재개발 골목 - 이철경

제1구역 재개발 골목 - 이철경 온기마저 잃은 쪽방 모퉁이에도 목련은 피고 지는데 독거의 아랫목은 식은 지 오래 혈기왕성했던 꽃들과 달리, 하나둘씩 생을 놓는 저 거친 삶의 종착지 고독했던 사람은 더 고독해지고 눈물지던 사람 더 큰 슬픔에 흐느끼는 인적 끊긴 봄밤의 절규가 골목마다 아우성이다 저 힘없이 고개 떨구던 꽃들은 참회의 눈물로 누군가는 서럽게 울다가 생을 놓는 일이 허다하다 제각기 변명을 바람 앞에 늘어놓으며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만, 처음 버려진 골목을 떠나지 못하는 유기견처럼 목련꽃 난자한 바닥에 깨진 달빛마저 처절하다 *시집/ 한정판 인생/ 실천문학사 한정판 인생 - 이철경 국가나 조직에서 입력된 명령에 따라 새벽이면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지요 저녁이면 퇴근길 한잔의 술도 할 수 있는 ..

한줄 詩 2021.04.08

당신은 첫눈입니까 - 이규리 시집

코로나라는 난데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작년 봄을 잃어 버렸다. 지금 들으면 까마득한 옛날처럼 들리지만 작년 봄에는 마스크를 살 수 없었다. 믿기지 않지만 마스크를 사려는 긴 줄이 판매소마다 펼쳐졌다. 사고 싶어도 날짜가 맞지 않으면 사지 못했다. 날짜뿐 아니라 신분증이 있어야만 마스크를 살 수 있었다. 마스크 대란 속에서 내년 봄은 온전히 맞을 수 있겠지 기대했다. 미처 꽃구경 할 겨를도 없이 지나간 작년 봄에 이어 올 봄도 잃어 버렸다. 봄이 일찍 왔다. 꽃도 일찍 피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제 막 봉오리를 내밀 꽃들이 올해는 이미 지고 없다.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기 마련이라 익숙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많은 게 엉망진창이다. 이런 일상에서 그나마 책이 있어 위로를 받는다. 특히 올 봄에 좋은 시집을 많이..

네줄 冊 2021.04.06

자목련 - 강민영

자목련 - 강민영 비에 젖은 목련 이파리 하나 주웠다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검게 멍이 든다 어머니 손등 저승꽃이 자목련 위에 피어난다 큰오빠 입에서 동그랗게 피워 올린 뜬구름 같은 도넛을 먹고 어머니는 마당에 각혈했다 젖은 솜이불을 이고 있는 듯 주저앉을 것 같은 나무는 멍든 사연을 수북하게 내려놓고도 머리가 무겁다 빗방울이 두드릴 때마다 위태로이 흔들리는 나무는 수십 년 동안 이별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홀로 깨어 뒤척이는 버리고 버릴 때마다 나무는 바람이 없어도 흔들리고 어머니는 혼자 떨어진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화전(花煎) - 강민영 진달래 화전 부쳐주던 어머니 빈 마대 자루가 되었다 우물이 깊어지는 봄 녹슨 대문 안에 잡풀들 무성하다 이불 속 노파를 간병인이 닦..

한줄 詩 2021.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