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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물리학개론 - 박인식

언어물리학개론 - 박인식 -꽃과 단풍 꽃은 필 때 단풍은 질 때가 절정의 말 꽃이 피고 단풍이 지는 동안 당신과 내가 머물던 말의 자리들 다시 꽃이 피고 또 다시 단풍 질 말의 절정에서 꽃말은 밝은 아침문을 열면서 당신도 열어 나를 말하는 중 단풍말은 투명한 저녁창을 닫으며 나도 닫아 당신을 듣는 중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여름언덕 언어물리학개론 - 박인식 -고도는 어제 온다 해놓고 어제 오지 않았다 오늘 온다더니 오늘도 오지 않는다 내일은 온다지만 내일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작도 끝도 기다림뿐인 고도는 누구인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이가 고도의 정체를 고도의 아버지에게 물었었지 -나도 모른다 알고 있다면 이미 썼겠지 사무엘 베케트의 언어물리학이 창작한 고도는 인간의 ..

한줄 詩 2021.04.09

종점 - 김유석

종점 - 김유석 오래된 벽화처럼, 담벼락에 두 사람의 노인네가 몸을 말고 붙어 있다. 서캐 같은 춘삼월 볕에 그림자가 이따금 꿈틀, 무릎에 묻힌 몸이 풀무치 잔해 같다. 같은 시각 같은 곳을 도는 읍내버스 내리고 타는 이 없어도 슬며시 문을 한 번 여닫고 돌아나갈 때 담장에 나란히 기대어 놓은 지팡이 하나가 스르르 눕는다. 살구꽃이파리 으슬으슬 가지를 털고 들고양이 울음이 소름을 한차례 돋쳤을 뿐, 떠난 몸에 묻어 있는 볕뉘 긁어모아 남은 이의 적막을 염하는 석양이 힐끗, 다음 배차 시간표를 들여다본다.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도서출판 상상인 처서 - 김유석 혼자 살다 가는 이의 유품 같은 날이었다. 지난다는 말, 물러간다는 기별 다시 오지 못한다는 뜻으로 울음보다 긴 적요를 끌고 다음 생을 건..

한줄 詩 2021.04.08

기어코 그녀 - 정이경

기어코 그녀 - 정이경 -우물가 자목련 한 그루 대문 밖으로 맴돌던 아버지 비문증이 있었고 이명이 심했다 스스로 유적이 되거나 유폐를 원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하게 아버지의 난시를 물려받았고 왼손잡이를 이어 가진 길고 긴 겨울 우듬지에 내걸린 나는 분명 다른 이름의 새였다 문고리가 담긴 액자 속에서 문지르고 문질러도 어김없이 제 몸과 이별하는 꽃만 가득했으므로 생의 한쪽 모퉁이가 나간 대문의 경첩 삭아 헐거워지도록 꽃을 피우고 잎을 피워내던 자목련 아래의 마당이 느릿느릿 일어나자 어떤 통곡을 감춘 검은 그루터기가 생겨났다 잠시 다녀간 햇빛들의 간격 사이로 발볼이 좁은 발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난, 엄마가 엄마를 베고 난 이후의 일이다 그 많은 눈은 언제 어느 우물에 눈 맞추고 있을까 *시집/ ..

한줄 詩 2021.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