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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 박주하 시집

요 근래 쫄깃쫄깃한 이 시집을 읽느라 더위 느낄 겨를이 없다. 라는 제목 또한 딱 어울린다. 사람도 이름 하나로 평생을 가듯 시집도 세상에 나올 때 제목이 참 중요하다. 백석의 시집 이 백 년이 다 되어 가지만 한국 문학 불세출의 시집 제목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내 이름에 심한 컴플렉스가 있어서 사람이든 시집이든 좋은 타이틀에 눈길이 가는 편이다. 이젠 이름으로 인한 불만을 놓을 때도 되었건만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이름에 대한 컴플렉스를 벗지 못할 것이다. 박주하 시인의 본명은 박인숙, 동명이인의 시인이 있어서 아님 이름이 너무 흔해서 필명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시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시도 잘 쓴다. 몇 편 읽어 보면 이 시인의 시적 내공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시가 찰지다고 해야 하나? 내 ..

네줄 冊 2021.06.28

숨겨둔 오지(奧地) - 배정숙

숨겨둔 오지(奧地) - 배정숙 보리앵두 제 풀에 익어 떨어지던 여름이 안으로 걸어 잠근 빗장의 암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딘 저녁상에 잰걸음으로 와서 고꾸라지던 허기의 붉은 발목 그 왼쪽은 늘 가을 쪽으로 기울고 싶었습니다 장독대 옆 정구지꽃 잘 퍼진 흰 쌀밥에 흘러간 시간이 배고파 칭얼댑니다 어머니가 읽고 또 읽고 유일신으로 신봉하시던 콩밭고랑 경전 개망초꽃 노란 눈알만 극구 제철 만났습니다 어머니 하고 불러보는 목젖 밑으로 울컥 솟는 초저녁 달 발아래로 엎어지는 눈물 냄새 날갯죽지 느슨하게 풀어놓고 싫어요- 아니오- 맘껏 외쳐도 덜미가 편안한 안전지대 이제 풋감 같은 큰 누이가 살이 오르던 찰진 시간을 어디에 숨겨놓고 바람이 편히 잠 들까요 마지막 모음의 탯자리까지 잃어버리고 허접한 부리를 어디에 묻..

한줄 詩 2021.06.28

관계에 관한 짧은 검색 - 천수호

관계에 관한 짧은 검색 - 천수호 나막신만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낙동강 하구언 작은 나루에 짧은 철로 두 개가 강물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잿빛 물은 깊고 철로는 해맑은데 나는 멀리 가야 할 사람 철로 끝에 가만가만 발끝도 대어보고 손끝으로 밀어봐도 쓰임이라는 건 도저히 잡히지 않고 투신이라는 벚꽃 잎만 낭자하게 날리는 사월 물결이 깨웠다 재웠다 하는 강물 위 물과 철로의 관계는 검색되지 않지만 배와 철로는 금방 닿을 수 있다 배를 미는 철로, 배를 맞는 철로, 배를 들어올리는 철로 가볍게 검색대를 통과하는 사람처럼 배를 한 번 들어올렸다가 내리는 관계 쓰임을 모르는 철로가 곤두박질친 바닷물의 합수 지역 강은 짐이 없고 바다는 챙이 큰 구름을 짐처럼 이고 있고 저 배와 관계없는 나는 구름보다 멀리 갈 ..

한줄 詩 2021.06.28